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집> 기울어짐에 대하여-문숙

쉴 틈 없는 육아를 하다 보면 책을 읽기 버거울 때가 있다.

책을 읽지 못하니 공허한 마음에 쓸데없이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 연애 면을 보고, SNS를 염탐하고, 봤던 기사 제목을 그림 보듯  몇 번이고 흘겨보는 습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헛헛한 마음은 계속됐기에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야만 했다.

그래서 시를 흉내 내며 글을 썼고, 나아가 시집도 읽기에 이르렀다.     


시에는 문외한이라  아는 시인이라고는 나태주 시인, 류시화 시인, 신경림 시인, 윤동주 시인 정도이며 그들의 시를 따로 읽어 본 적은 없다. 시라는 건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시들이 마지막이었고 그 후로는 나와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그랬던 내가...  시를 알아갈수록 취향에 맞는 시인을 찾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블로그를 기웃거리다 문숙 시인의 '기울어짐에 대하여'라는 시를 접하게 되었다.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하자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보란다

  생각해보니 옳은 말이다


  노처녀였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짝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것도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 게바라도 김지하도

  삐딱하게 세상을 보다 혁명을 하였고

  어릴 때부터 엉뚱했던 빌게이츠는

  컴퓨터 신화를 이뤘다

  꽃을 삐딱하게 바라본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고

  노인들도 중심을 구보려

  지갑을 열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돈도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 「기울어짐에 대하여」전문



일상적이며 난해하지도 않아 쉽게 읽혀서 그녀의 다른 시들도 궁금해졌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봤지만 다양한 시는 검색되지 않았고 인터넷 화면 하단에 띄어져 있는 그녀의 시집에 눈이 갔다.      


'그래! 시집을 읽으면 되겠네!'  

   

내 품에 안긴 그녀의 시집은 역시나 내가 원하는 성향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일상생활 어디서나 소재를 가져와 시를 노래했다.

액자를 떼어내면서도, 과자를 먹으면서도, 다림질을 하면서도, 부엌에 있는 양파 망을 보면서도.

자질구레한 온갖 일상사가 모두 시적 대상이었다.

난 그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육아로 집안에만 있다 보니, 매일 마주치는 풍경, 매일 보내는 일상, 매일 느끼는 감정, 매일 내 옆에 있는 사람.

그 모든 게 같았고, 단순했고, 변함없는 뻔하디 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뻔한 일상의  한 부분을 끄집어내어 시로 표현했고, 그 시를 만나는 동안에 나는 일탈하는 느낌을 받았다.

평이한 시어, 과장되지 않은 수사적 기교, 난해한 표현이 없어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도 무척 좋았다.     


읽다 보니 그녀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특징이 있었다.

1연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일반적 진실에 빗대고

2연에서는 시인의 경험한 인생으로 연결되며

마지막 연에서는 다시 앞의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며 마무리되는 구성의 흐름이 많은데, 그 속에서 묵직한 울림으로 승화시키는 그녀에게 감탄하기도 했다.     


또한 시의 서정적 화자가 시인 자신과 거의 변별이 안되는 것도 좋았다.

사실 이전에 읽었던 안도현 시인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에서 시적 화자와 시인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 규칙이 내겐 거북했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시를 흉내 냈던 나로서는 시의 화자가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나 자신인데,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니, 시가 어려워졌고 거리감이 들었다.

그런데 문숙 시인은 그 틀을 깨주었고 내 어깨에 무겁게 올려졌던 시의 화자를 가볍게 해주었다.   

  

시를 읽다 보면, 문숙 시인이 앞에 서 있는 게 보이기도 했다.     


그녀로 인해 뻔한 일상의 모든 것이 시로 승화되는 것을 옅봤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2012년 이후로는 시집을 발표하지 않고 계신데 바쁘시더라도 부디 내 주셨으면 좋겠다.     


그녀의 시를 열렬히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그물망 속에 든 양파     


서로 맞닿은 부분이 짓물러 있다     


간격을 무시한 탓이다     


속이 무른 것일수록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을     


상처란 때로 외로움을 참지 못해 생긴다.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상해서 냄새를 피운다     


누군가를 늘 가슴에 붙이고 사는 일     


자신을 부패시키는 일이다     


- 「집착」 전문     


(그녀의 시각이 날카롭다망에 든 양파를 보고 삶의 진리를 해석하다니놀랍다양파나 감자같이 속이 무른 것들이 쉽게 부패해 악취를 풍기는 것을 보고 시인은 심성이 여리고 누군가에게 기대 보호받고 싶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상처받고 아파하는 삶의 진실을 떠올린다가족은 누구보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부대끼며 살아가기 때문에 작은 충돌이나 마찰에도 쉽게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한다그것은 가족 사이의 거리가 그만큼 가깝고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가족 사이의 집착에서 발생하는 아픔과 상처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내 마음의 환부가 더욱 크고 농이 역한 것은 그만큼 내가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다.)                     



        





둘이 합쳐지는 곳엔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늦은 밤 쿵쿵 발자국 소리와 새댁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     


마음 섞는 일이 전쟁이다

우루루 우루루

가슴 밑바닥으로 바위 구르는 소리를 토해낸다

돌덩이들이 암초로 박혀드는 시간이다     


수면을 편편하게 하는 일 부드러운 물길만은 아니어서

부딪혀 조각난 것들 가라앉히는 시간만큼 탁하고 시끄럽다

저 지루한 싸움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 익사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 「울들목」전문     


(어쩜 부부 싸움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둘이 합쳐지는 곳엔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기가막히다.

수위가 다른 물살이 만나면 부딪히고거친 흐름이 생기고부서지는 모습을 보며 '부부싸움'을 연상시키다니...감명깊다.)                    


         





침대 한쪽이 한숨처럼 푹 꺼졌다.

그가 한쪽 엉덩이만 걸치고 거울을 보던 곳이다

언제부턴가 마음 한쪽만 내려놓고 외출이 잦았다

가출한 마음을 좇다 한 가슴이 기어이 무너졌다

반쪽을 올려놓고 견딘 불편한 세월이 투둑 소리를 낸다

서로를 포개고 안개 꽃처럼 피워내던 향기는 흔적 없고

한 사람의 무게에 눌렸다가 원위치 하던 스프링의 날은 갔다

균형을 잃은 시간이 죽음처럼 흘러간다

아닌 척 모른 척 기댄 세월이 눅눅하다

젊은 날 탱탱했던 설렘은 바람 빠진 풍선이다

다시 알콩달콩 살아내는 일

쪼그라든 가슴을 억지로 부풀리고

때로는 헛웃음으로 기우뚱한 세월을 견뎌야 한다     


- 「낡은 침대」전문        






                               

전선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다

포크레인에 가로수의 뿌리가 잘려나간다

긴 시간 통증을 앓으며 시든 나날을 보낼 저 가로수     


어쭙잖은 여동생을 위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던 오빠

그날은 눈물 범벅이 된 채 밤새 몸을 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냈다

착한 오빠는 내게 그런 모습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면 욱신거리는 제 뿌리를 들여다보며 다독였던 날들을

그때 나는 내 길만을 가느라 알지 못했다     


가로수 옆에 전선을 묻고는 감쪽같이 흙을 덮고 있다

이제 보이지 않는 저 가로수의 깊고 어두운 상처를

뒤돌아서는 순간 나는 또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  「가로수」 전문                              





         

결혼이란 안장과 체인이 두 개 달리 자전거를 타는 일이지

앞사람이 페달을 밟아 뒷바퀴를 끌면

뒷사람은 발을 맞추면 된다네

마음이 합쳐지지 않으면 바퀴는 구르지 않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다 보면

두 바퀴를 몰고 있던 체인이 벗어나기도 한다네

그럴 땐 자전거를 세우고 다시 체인을 걸어야 하지

앞바퀴와 뒷바퀴를 묶으며 기름때를 묻히기도 한다네     


한 번 벗어난 체인은 쉽게 고정되지 않지

시간을 흘리며 생을 낭비하기도 한다네

짐이 돼버린 자전거를 끌며 서로를 원망하기도 하지

지쳐 있는 두 사람은 목적지가 멀기만 하다네     


각자 길을 되돌아보며

바퀴에 감긴 시간을 계산해 보기도 한다네

그러다가 문득 뒷바퀴를 돌려서 앞바퀴를 굴릴 생각을 하지

때로는 뒷바퀴가 앞바퀴를 밀고 가기도 한다네     


- 「2인용 자전거」 전문                             






               

- 젊은이, 왜 난 자꾸 몸이 가라앉는 거유?

   늙은 뼈마디에는 수영이 좋다고 혀서

   이 나이 되고 보니 아픈 데고 많고

   참 억울한 것도 많어     


수영장에 온 지 달포가 지난 할머니

탱탱하던 젊음이 빠져나간 조글조글한 몸

오늘은 야매 시술로 얼굴에 핀 저승꽃도 지우고

만화 속 캔디 같은 얼굴이다     


홀쭉해진 엉덩이가 바람 빠진 풍선이다

자꾸만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2미터도 되지 않는 수심이

칠십이 넘는 세월을 떠받치기엔 버겁다    

 

- 할머니, 몸에 힘을 빼세요

   편안히 물에다 몸을 맡기세요

   물속이든 물 밖이든

   자신을 내려놓아야 가벼워진대요     


숨을 참고 주름진 마음을 복어처럼 부풀리며

물 위에 자꾸 몸을 뉘어보는 할머니

생의 극점을 향해

한 마리 자유로운 물고기가 되고 싶은 저 몸부림     


- 「수영장에서」 전문     









매거진의 이전글 [책리뷰]말하다-김영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