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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행성]며느리 사표-영주

만족도: ★★★☆☆


▒ 그녀와 우리 엄마와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한 인간의 삶의 무게는 누구도 쉽게  대항할 수 없는 무기가 되어 독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개인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적어간 글은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다.

괴로운 인생이더라도 글로써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내가 겪을 수 없고, 다수가 겪을 수 없는 경험을 뚜벅뚜벅 걸어간 이들의 글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뭐라고 항변할 수 있는 글도 아니요, 대체할 수 있는 글도 아니다. 

그들의 삶이고 그들의 선택이며, 그로 인한 책임을 스스로 지며 나아간 발자국을 우린 조용히 따라갈 뿐이다.


그녀의 책을 읽다 보면 남편의 행동으로 힘들었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라도 이혼을 생각하겠어!!'


가족에 대한, 아내에 대한 배려 따윈 없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속 좁은 이기주의자와 어찌 살겠나.


고집도 세서 변하지 않는 건 눈에 보듯 뻔한데

그로 인해 주위 사람만 상처받아 골골 거리겠지


그럴 바엔 저자의 결단에 박수쳐주고 싶다.

그 시간이 다소 오래 걸렸지만 쌓인 시간으로 단단해진 벽을 부스기란 어려웠을 법도 한데, 본인의 행복에 집중하며 깨트린 그녀에게 박수쳐주고 싶다.  


그녀의 힘겨운 작은 날갯짓이 나비효과가 되어 삶을 변화시켜 나간다.

이혼을 통보받았던 남편은 한 번의 기회를 마지막으로 달라며 애달프게 요구했고, 점차 다른 사람으로 변화하며,  살얼음 같던 부부 관계는 호전된다.

시부모님에게도 며느리 사표를 던지며 그녀를 둘러싼 괴롭던 상황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녀의 결단과 용기가 아니었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겠지.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 시대에는 결혼하면 시댁에 들어가 시댁 식구들과 살고, 시댁 식구들의 뒷바라지와 대소사를 챙기고, 아이들은 엄마가 전적으로 맡았으며, 아내와 며느리 엄마라는 자리를 힘들고 괴롭더라도 우두커니 지켜내는 것이 여자의 숙명이라 받아들이며 살았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여자의 삶의 모습이기에 당연시 여기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그랬고,  시어머니가 그랬으며, 주위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게 사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울타리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이와 우리 엄마와 시어머니와의 나이차가 많지 않을 텐데 다른 걸 바라볼 수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일지도 모른다.

다수를 위해 한 명이 참고 희생해주면 주위 사람들은 평범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여자에게 역경과 평범한 일상이 상생하는 가정이라는 틀에서 관념적인 안전함을 놓지 못한 채 누구나 그렇듯 유별나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그녀는 깨트린다.


만약 나라면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게 들으며 세뇌당하다시피 한 일을 외면할 수 있는 시각과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녀와 우리 엄마와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역경을 당연히 받아들이며 살아 간 엄마.

타인들이 원하는 삶보단 자기 인생을 되찾고자 하는 저자.



성향 차이라고 하기엔 무언가가 부족하다.

수긍과 부정 사이에서 고심해봐야 할까.







▒ 꿈속에는 메시지가 있다 



오묘한 꿈을 꾸거나, 섬뜩한 꿈을 꾸거나, 특이한 꿈을 꾸면 꿈해몽을 검색하게 된다.

저자는 ‘가족 꿈 심리 작업소’를 운영했던 저력으로



PART 2 / 나를 찾아가다

3장. 꿈을 통해 나를 마주하다 

4장. 나와 너, 서로를 비추는 거울 작업 




에서는 꿈에 관한 해석들을 다루고 있다.


평소에 궁금해했던 죽는 꿈. 싫어하는 지인이 나오는 꿈에 관한 해석이 나오며, 탁월한 효자손이 되어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 주었다.



- 자살하거나 살인하는 꿈은, 심오한 변화와 성장이 스스로의 의식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꿈 작업가 제러미 테일러는 말한다. 현실에서 자신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에 있을 때, 그 이전의 내가 죽지 않으면 변화와 성장이 어렵다는 것이다. (···) 사람은 변태하는 동물이 아니기에 외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내면에 이런 성장과 변화가 있을 때 꿈에 죽음이 나온다.  [53% (156)]


- 그 친구가 꿈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 보지 못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그 친구만큼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그러는 것이다. 잘난 체하고 불평불만 많은 그 친구의 모습이 사실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60% (177)]


- 상대의 모습이 자신에게서 사라질 때 꿈에 죽음이 등장하기도 한다. 죽었다는 것은 자신 안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죽어버렸음을 의미한다. [62% (183)]



꿈이라는 암막에 메시지들이 내포되어 있다니... 신기하다.


이 책 마지막 부록에는 꿈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거울 작업>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만약, 꿈에 싫어하는 사람이 나왔다면, 그의 싫은 모습 세 가지를 적어보고, 주어를 나로 바꾸면, 자신 안에 싫은 모습이 그녀로 인해 투영되어 나왔다는 식이다.


언젠간 유익하게 쓰일 것 같아 내용을 남겨본다. 


 









[8% (23)]

"우리는 우리대로 잘 살고, 너희는 너희대로 아이들하고 재밌게 잘 살면 되는 거 아니냐. 네가 항상 마음고생하는 거 늘 고맙게 생각했다. 네 몸 건강에 신경 쓰고 우리 걱정은 말아라."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그들도 그동안 며느리의 고충을 어느 정도는 짐작했으면서도 종갓집 며느리의 당연한 일거리로 치부하며 그러려니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며느리 사표로 인해, 그제야 그녀의 고생을 대면한 죄책감으로 늦게나마 수긍해준 거겠지? 


또한 앞에 놓인 큰일이 예상외로 덤덤히 너무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짚어보는 기회였다.)



[9% (26)]

"니가 그라믄 안 된다. 어떡하노..."

세상에서 가장 난감한 일을 당한 듯,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스러워하시던 어머니는 결국 "니가 시댁에 안 갈끼면 예도 오지 마라. 내가 사위 얼굴 몬 본다."라고 말씀하셨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크나큰 두 개의 뿌리. 근원지를 싹둑 자른 그녀가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17% (50)]

나의 독립

그리고 딸과 아들의 독립 연습

(아직 가녀린 딸을 풍파가 몰아치는 현실로 배웅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너무 모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들의 독립은 좋지만 원치 않아 눈물 흘리는 자식을 애써 내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만약 내 부모가 그런다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보다는 원망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독립한 딸은 냉정한 현실로 허구한 날 마음에 빗줄기가 쏟아지며 추적추적하게 삶을 바라보지 않길 바라는 걱정이 컸다.


후반부를 읽으니 딸은 다행히도 잘 이겨냈다.

온실 속 화초에서 벗어나 꿋꿋하게 살아가는 게 어려웠을 텐데도 이겨낸 모습이 대견스럽다. 


하루하루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아가고.

자기가 벌어서 먹고. 자는 일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 내야 하는 어른으로 한 뼘 더 자라났다.


저자의 선택이 옳아서 다행이다)



[27% (79)]

결혼 후 남편은 맏며느리 자리에 나를 앉혀놓고 자신은 쏙 빠진 듯 부재중이었다.

(남편이 조금만 더 저자의 위치와 상황 마음을 헤아려줬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야속했다

어쩜 저리도 아내를 위하지 않는 건가


이런 걸 보면 우리 시대의 엄마 모습이 생각났다

그 시절 어찌 이겨냈을까 

대단하기만 하다)



[25% (74)]

아무도 나에게 고통을 줄 수 없다. 시어머니도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왜 이제야 꺼내주는가."라는 탄식은,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고 시어머니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내 삶을 책임질 사람은 나 자신이기에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나는 왜 이제야 내 신발을 찾는가?'

신발을 잃어버린 것은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내 것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잃어버렸을 때 기를 쓰고 찾지 않은 것도 내 책임이다. 한 번이라도, 신고 있던 낡고 맞지 않는 신발을 보고 질문했어야 했다.



[30% (88)]

"회사에서는 월급쟁이라서 어쩔 수 없이 회사의 규정을 지킬 수밖에 없지. 그러나 집에서는, 내 집인데 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나."하며 오히려 '직장 생활로 스트레스를 받는 가장으로서의 애환'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했다.




[35% (103)]

남편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는 금기, 열어봐선 안 된다는 금기를 오랫동안 깨지 못했다. 왠지 남편이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사랑을 잃을 것 같았다. 더 깊숙한 곳에는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이 내게서 멀어질수록 더욱 남편이 원하는 여자가 되려고 했다. 분노했지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금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럴수록 삶은 더욱 비참해져갔고 남편과 시댁의 '보이지 않는 통제에 완전히 굴복하고' 살게 되었다. 너무 두려워서 남편과 시댁의 얼굴에 등불을 들이대지 못했다.



[42% (124)]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알 수만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부모 교육 강의와 심리 공부를 하면서 꿈이란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43% (127)]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워하며 열어보았던 상자에서 나 자산의 몹쓸 것들을 만나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며 아픔이었다. 그럼에도 매일 상자 열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 안에 남아 있는 희망 때문이었다. 꿈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희망이 다독여주며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아무리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꿈이라 하더라도 모든 꿈은 그 자체로 희망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희망의 끈을 잡고 꿈을 적으며 나 자신을 만나왔다.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더 이상 나아가기 어려웠을 때, 평화로운 마음을 갖고 싶어 찾아다녔던 간절함이 꿈이라는 상자를 열게 해주었다. 나의 꿈을 들여 댜 보고 나니, 꿈은 상처와 고통을 넘어 그 이상의 깊은 지혜를 전해주고 삶의 균형과 방향을 제시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라도 용기를 내어 그 상자를 연다면,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필요로 했던 것들이 모두 자신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꿈은 판도라의 상자이며, 내게 주는 선물이다.

(꿈을 바라보는 시건에 대하여 되짚어볼 수 있었다.

큰 꿈이라 해도, 너무 멀어 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 순간 마음에 담고, 되뇌고, 다짐하는 이유는 그 안에 남아 있는 희망 때문이다. 꿈으로 인해 고통스럽더라도 희망을 생각하며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그 희망으로 나는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48% (142)]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몸속에서 소화시켜 영양분은 흡수하고 찌꺼기인 대소변은 배출해내야 한다. 몸에 쌓이는 노폐물은 어느 시점이 되면 몸에서 비우라는 신호를 보내게 되고, 우리는 화장실에 가서 몸 밖으로 내보낸다. 대소변은 몸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 억누르고 참아낼 수 없다. 그럼에도 오래 참게 되면 변비에 걸리거나, 신장과 대장에 문제가 생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매일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 들어오는 정보들도 내면에서 소화시키고 어느 시점이 되면 배설(혹은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 마음의 변비에 걸린다.



[49% (145)]

나의 어떤 생각, 감정을 표현할 때 상대가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봐 드러내지 못한다면, 마치 자신 안에는 똥오줌이 없는 사람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내 안에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똥오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유가 세면서 신선하다. 작가가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똥오줌'으로까지 비유한 것은 독자들에게 본인의 의견을 얼마나 중요하게  피력하고자 했는지 느껴진다.)




[63% (186)]

부러움은 고통의 감정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그런 요소가 전무하다는 것,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도저히 저런 멋진 사람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그러나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솝 우화》에 개 한 마리가 고기 한 덩이를 물고 가다가 강물에 비친 다른 개 한 마리를 보게 된다. 그 개가 자기 고기보다 훨씬 커 보였고, 먹고 싶어 으르렁거리다가 그만 물고 있던 고기를 강물에 떨어뜨린다. 

(···) 자신이 부러워하는 모습은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같다. 그저 바라보고 부러워하는 것은 자신이 물고 있던 고기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타인을 통해 보게 되는 부러운 요소는 자신에게도 있는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이 무엇을 물고 있는지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갈고닦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무엇이기 때문이다. (···) 난 그저 동생을 부러워만 할 뿐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할 생각이 없었다.

(글을 쓰게 되면서 샘이 나고, 부럽고, 동경하는 작가님이 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아이 엄마로써 독서하고 글을 쓰고 책 출간의 목표를 잡고 계셨다. 어느 날 그녀는 출간을 했고, 첫 책이 나왔다.

그 책은 10년 이상의 독서 내공으로 똘똘 뭉쳐져 빛을 밝혔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훨훨 날기 시작했다.

얼마 후 두 번째 책도 출간했고, 첫 책으로 열혈 팬들이 생겨 또 한 번의 사랑을 받으며 더 멀리 날아가고 있다. 

며칠 전에는 첫 번째 책을 작업했던 출판사로부터 의뢰를 받아 세 번째 책 집필을 코앞에 두고 있다.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빠른 날갯짓으로 따라갈 수도 없는 위치에 도달해 버린 그녀를 보면, 속상하고, 샘이 나고 부럽기도 하다.

그녀처럼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질투라는 거울로 투영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팬이 생긴다는 것은 격려와 독려를 주기에, 그 응원을 받아 보고 싶다.

멀리, 높이 날아가는 그녀의 날갯짓이 너무 부럽다.

그녀의 내공이 부럽다. 오랜 기간 독서로 탄탄히 다져진 꽉 찬 마음의 양식을, 나도 가져보고 싶다.

그렇기에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 있도록, 롤모델로 삼아 내 나름대로 방향을 잡으며 나아가고 있다.

처음보단 덜해진 질투는 앞으로도 더욱 약해지며, 그녀의 행보를 보며 좋은 자극제로 삼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녀처럼 되기 위해서는 많은 독서와 글쓰기 내공이 다져져야 함을 알기에, 오늘도 난 시간 나는 대로 독서하고 글을 쓴다.)



[65% (192)]

자신의 아이들에게 큰 짐을 지우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으니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대신 이루기를' 자녀들에게 원한다. 그 이면엔 자신은 애쓰고 싶지 않다는 게으름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 금이 든 광맥을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개발 안 하는 것과 같다고 로버트 존슨은 말한다. 우리는 자신 안의 세종대왕, 신사임당의 숭고한 특질을 발견해서 실천하기보다는 멀리서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실천하자.

잠재적인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시간의 무게에 달린 노력과 성실함을 보고 배우고 느끼며 발판 삼아 내 안에 무언가 꽉 찰 수 있기를)




[78% (230)]

어른으로의 삶은 경제적, 심리적, 물리적인 독립과 자신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85%(251)]

진짜 결혼은 로맨틱 환상에서 깨어나 각자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그리고 서로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6% (254)]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부부의 대화에서 두 가지 공통적인 문제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서로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서 듣지 않는 것, 그리고 서로 들을 수 없는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다.



[88% (260)]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돌볼 때 오히려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에게 먼저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과는 다르다. 



[89% (263)]

언젠가 TV에서 보니 한 곤충학자가 애벌레의 몸부림이 측은하여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밖에서 도와주었다. 그렇게 누에고치에서 나온 나비는 비실비실 제대로 날아보지도 못하고 이내 죽는 것을 보았다. 병아리 또한 알을 깨고 나올 때, 외부에서 도와주면 밖으로 나온 병아리는 금방 죽는다고 한다. 애벌레도 병아리도 인간도, 스스로의 힘으로 깨고 나와야만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알에서 깨고 나오는 고통을 측은지심으로 도와주는 것은 살인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고통을 겪고 나와야만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여보, 최선을 다해서 당신 자신을 보살피는 거예요.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나 자신을 보살필게요. 그렇게 하면 당신과 내가 평화로운 부부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이 말은 아들과 딸에게도 해주고 싶다. "서로가 자신에게 최선을 다할 때, 우리가 풍요로운 가족으로 살아가게 될 거야." 우리 모두가 한 마리 나비로 살아가기를 기대해본다.



[91% (269)]

나의 소중한 딸과 아들, 나에게서 태어났지만, 나는 아이들로 인해 어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딸아들의 육체를 키워준 부모이지만, 아이들은 나와 남편을 키워준 영혼의 부모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키워주며 자신을 책임지고 최선을 다하는 어른으로 성장해갈 것입니다.

(아이들은 나와 남편을 키워준 영혼의 부모라는 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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