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의 고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달력 어플을 열었다. 오늘은 2019년 10월 11일. 전업주부가 된지도 2년이 넘었다. 첫째는 2017년 07월 24일 어린이집에서 퇴소 통보를 받았고, 나는 한 달 후 일을 그만두었다. 휴. 입술을 깨물며 내년 달력을 손가락으로 툭 밀어 보다가 3월에 멈춘다. 둘째가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겠구나 생각하며 남은 시간을 계산한다. 앞으로 4개월이다. 둘째와 보낸 14개월보다 짧은데 왜 멀게만 느껴질까.



전업주부는 내 인생에서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맞벌이를 했다. 대가족을 이루던 어린 시기에 나는 삼촌, 고모,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의 손을 골고루 받으며 자랐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 아빠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가게에서 일했다. 아빠는 커다란 실크인쇄기 앞에 앉아 있고 엄마는 그 옆에 서 있다. 아빠가 왼손으로 인쇄판을 내리면 스쿼지를 잡은 오른손이 움직였다. 아빠는 민첩하면서도 정확하게 잉크를 고르게 피면서 문질렀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인쇄판을 다시 올렸다. 그 아래에 있던 종이가방에는 글자가 반질반질하게 찍혀 있다. 그럼 엄마는 인쇄된 종이가방을 가져가 허리를 돌려 건조대에 차곡차곡 올려놨다.



어린 내겐 글자가 없던 종이가방에 글자가 새겨지는 게 너무 신기했다. 부모님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할 때마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일을 하는 아빠 엄마는 내게서 더욱 커 보였다. 바쁠 때는 우리 삼 남매도 동원되었다. 다 마른 종이가방을 5개씩 끼워 쌓아 올렸다. 누가 더 빨리 더 높게 쌓나 하며 삼 남매는 자주 시합을 벌였다. 참 재밌었다. 잘한다 잘한다고 말하는 부모님의 칭찬은 종이가방 탑을 더 높이 쌓게 했다.



어릴 적부터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아서 일까. 나는 엄마가 돼도 일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째를 낳기 전까지 그러니까 자그마치 7년 동안 일했다. 그리고 출산휴가 3개월, 육아 휴직 3개월 후 바로 복직했다. 첫째를 낳고 육아하던 6개월 동안 명확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는 일을 해야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라는 사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돼도 당연히 일해야 한다던 생각은 그 시기를 거치며 더욱 단단해졌다.



그러나 2017년 7월 24일 내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일이 일찍 끝나서 아이와 키즈카페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린이집을 향했다. 초인종을 누른다. “최세연이요!” 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원장님이 내게 인사를 건네며 잠시 면담을 하자고 했다. 뭐지 싶었다. 예고도 없이 면담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원장님을 따라 햇살반이라고 적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 들어오는 곳이었다. 방안을 빙 둘러보는데 원장님이 말했다. “세연이 일로 저희 교직원이 정말 많이 의논했어요.” “네?!” 원장님의 표정은 심각했다. 세연이가 담임선생님이 바뀌면서 적응을 못했다고 했다. 그 부분은 나도 알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바뀌고 한 달이 지날 무렵 원장님이 말했던 사실이다. 얼마 후 차차 나아지고 있다며 걱정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신랑과 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부부는 하원 할 때마다 세연이 상태를 물었고, 선생님과 원장님은 괜찮았다고 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난 지금 햇살반에 앉아 있는 원장님 입은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하느라 멈추지 않았다.

초반엔 새 담임선생님과 적응을 하는 듯 했단다. 그러다 혼자 헛돌기 시작했고 징징거리다 심하게 우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너무 심할 땐 원장님이 따로 데리고 나가 산책도 시켰지만, 원장님이 없을 때면 원상태로 돌아왔단다. 아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자주 울어대는 아이 울음소리에 아파트 경비실에서부터 윗집, 옆집에 이르기까지 항의를 받았다고 했다. 이제는 다른 아이들의 생활에도 타격을 주어 며칠 전 교직원들과 의논을 했고, 새로운 환경으로 아이를 옮기면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럴 수가!!!!! 어떻게 부모에게 이 심각한 사항을 말하지 않을 수 있지?! 어떠한 예고도 없이 커다란 폭탄을 터트린 원장님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동안 일말의 말도 안 했는지 따져 물었다. 우리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본인들이 하는 데까진 해보고 안되면 그때 말하려 했단다. 그때 왜 난 어린이집을 뒤집어엎지 못했을까.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아이에게도 죄스러웠고,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침 7시 반에 등원해서 저녁 7시 반에 하원 했던 아이. 그동안 세연이가 아침마다 울고불고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고 한 것도, 어린이집 문 앞에서 데굴데굴 굴었던 것도, 아이 딴엔 처절한 몸부림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큰 돌덩이가 가슴팍에 박혔다. 우리 부부는 감기처럼 걸렸다 마는 아이의 투정으로 여겼다. 출근하느라 바빴고, 퇴근하느라 분주했다. 하원 시키고 아이를 돌보기 바빴다. 담임선생님과의 적응이 더딘 아이가 걱정은 되었지만, 큰 문젯거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걸지도 모르겠다. 아이로 인해 직장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고, 아이가 있는 엄마는 그럼 그렇지라는 눈총도 받고 싶지 않았다. 난 그저 일을 다니고 싶었고, 일상이 흔들리지 않길 바랬다.



우린 당장 다음날부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골칫거리가 된 아이를 향한 선생님들의 시선을 상상하니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4살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행히 어머님이 잠시 쉴 수 있어서 세연이를 돌봐주셨다. 자식에게 생긴 문제는 온 집안과 내 세계를 통째로 흔드는 강력한 지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초보 엄마는 그때 처음 경험했다. 세연이는 내 삶의 바닥을 이루고, 그 위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바닥이 흔들리면 나도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 사건은 내 가슴에 여전히 멍으로 남아 아프다.

그 사이 우리는 이사를 했고, 첫째는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했다. 그리고 나는 둘째를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신랑과 술을 마시며 내가 일을 다시 다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머니는 첫째의 일도 있었고, 아직 본인이 벌기도 하니 너는 아이들이 클 때까지 살림과 육아에 집중하는 게 어떠냐고 물으셨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업주부로 지내다 보니 적응이 되었고, 둘째가 어린이집을 다니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생활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내 손길을 벗어났을 때를 떠올려 봤다. 집안에서 살림만 하다 늙어가는 게 겁이 났다. 뒤늦게 일을 구하려다 무기력해진 나에게 상처 받는 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구직사이트를 열어본다. 나는 한 가지를 염두하며 화면을 응시했다. 내가 아이들을 등 하원 시킬 수 있는 시간대를 살피고 또 살폈다. 적성과 흥미보단 육아에 제약이 가지 않는 선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가득 올려져 있는 일자리 중 반에 반에 반은 떨어져 나간다. 벌써부터 침울해진다. 엄마를 위한 자택 알바는 왜 이리도 많은지. 그러다 눈길을 사로잡는 조건이 보인다. 주 5일, 시간 협의 가능, 월급 450만 원. 뭔가 수상하다. 10시부터 4시 사이로 일할 수 있는 곳을 다시 샅샅이 찾아본다. 어깨가 점점 내려간다. 경력이 리셋 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아이를 키우며 병행 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적당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만약 구한다 해도 계속 다닐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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