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결혼생활과 육아를 점검하고 싶었던 차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사회학이란 전문적인 분야를 통해 나의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깨닫게 되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만의 가정을 체크하고 우리끼리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개인을 넘어 사회적으로 심도 있게 바라봐야 한다는 걸...... 우리의 문제는 나와 너의 문제가 아닌 더 넓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말이다. 다양한 문제들을 사회구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책을 통해 좁았던 식견을 깨트릴 수 있었다.
특히나 내 식견이 좁다는 걸 느낀 부분은. <모성은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한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의견을 마주했을 때다. "18세기에 이르러 모성애를 인류와 사회에 이익이 되는 본능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가치로서 찬미하기 시작하는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모유 수유조차 불결하다고 생각했던 직전의 사회와 비교했다."라는 책 속 인용구는 기본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수준에서 해석해버렸다. 책의 흐름으로 볼 때 인류와 사회에 이익이라는 구절에서 인류의 이익이란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인 가정에서 국가를 조직하는 사회 구성원들을 배출해 내는 것을 말하고, 사회의 이익이란 남성들의 사회적인 참여와 노동력으로 인해 사회가 원활히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를 위해서 여성은 모성이란 본능으로 아이를 출산하여 양육해야 하고, 남자는 아버지로서 가정을 책임지고, 돈 벌고, 남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여성은 남성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살림을 비롯한 양육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말한 대목이 아닐까 한다. 해석이 우왕좌왕하니 다시 정리해보자면, 남자가 바깥일을 잘할 수 있도록 여자는 가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살림하고 모성이란 본능으로 아이를 잘 키워서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로 여자의 모성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정리하면 될 듯하다. 근데 내가 가늠한 해석이 맞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조만간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책 <만들어진 모성>을 읽어보고자 한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서는 다방면의 사회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사회문제는 곧 사람이 문제다. 모순된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우리가 우리를 직시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여러 방면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나는 "과시적 소비"를 지적한 부분에 초점을 두었다. "과시적 소비"는 우리 가까이, 일상에서 항상 이뤄지는 일이다.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구매를 하는 것인데, 양육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부모들은 소매를 걷어가며 열심히다. 그 무리에는 다들 하는데도 안 하는 엄마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들은 이상한 엄마, 아이에게 이쁜 옷을 사 입히지 않고, 옷도 되는대로 입히면 무심한 엄마, 아이 교육에 신경 쓰지 않으면 무책임한 엄마로 낙인찍힌다.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주관대로 육아를 하는 것에 그렇게까지 핀잔을 들어야 하는 행동인가 싶지만,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간다. 안 맞는 옷을 강압적으로 구겨 넣어 입는다면 어디 불편해서 살 수 있겠는가. 책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개인이 노력한다고 변화되는 게 아니라, 자기의 희생을 아이의 성공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바뀌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경쟁 사회의 뿌리부터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과시적 소비도 남보다 뒤처지지 않게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경쟁의 한 부분인 것이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는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게, 남들보다 번듯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둔다. 이를 위해 많은 부모들은 아이의 어린 시절부터 물심양면이다. 신생아 수는 파격적으로 줄고 있는데, 관련 시장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는 게 그 증거다. 아기 때부터 남들보다 더 좋은, 뒤처지지 않게라는 수면 밑의 경쟁으로 비싸고 이름 있는 브랜드들은 능력 있는 부모라면 아이에게 해줘야 하는 필수품으로 여기는 풍토까지 생겨났다.
아이가 취학아동이 되면, 제2라운드인 교육 경쟁이 펼쳐지게 된다. 그래서 사교육비는 하늘을 찌른다. 사회 문제라 하는데도 식을 줄 모른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대치동이나 강남 엄마처럼 지극정성으로 자녀 교육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자기는 유난 떠는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비싼 사교육비를 떠나, 아이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자기가 설정한 아이의 목표를 위해 자기 수준에 맞게 헌신하며, 아이의 성공으로 보상받으려 한다는 게 문제다. 이 바탕에는 "경제적으로는 너희보다 부족해도, 아이를 더 멋지게 키운 나는 너희보다 성공했어."라고 보여주고픈 의식이 깔려 있다고 책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날카롭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제3라운드인 취업 경쟁에 발을 디디게 된다. 너도 나도 취업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공무원 시험은 해마다 지원자가 늘어난다. 자녀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부모는 또 물심양면으로 거든다.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면, 집 장만을 위해 다시 한번 소매를 걷어붙인다.
여기서 난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책을 통해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 나이에 가질 수 없는 금액대의 집을 소유하거나 살게 된 부부들을 보며 샘이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일군 게 아니라는 명목 하에 우리는 부모의 도움 없이 우리끼리 해결했으니 그들보다 더 성숙한 성인이라고 합리화했다. 부모의 도움을 받은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나가기보단 수월하게 피해 가려는 도피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보다 우리가 더 성숙한 성인이라고 상기했다. 근데 이 책을 통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부모의 도움을 받은 자녀들은 항상 고마움과 미안함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게 되므로 부모가 본인들의 가정사나 생활에 개입을 해도 막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 즉 돈을 준 자와 받은 자로 갑과 을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부모의 도움을 받았기에 선을 넘는 부모의 개입에 어찌할 수 없는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부모들은 자식에게 큰 도움을 줬다며 기세 등등하게 간섭한다. 자식의 짜증과 핀잔에도 꿋꿋하게 개입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오싹하다. 역시 모든 일에는 양지와 음지가 존재하나 보다. 그걸 알게 되니,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아 그들보다는 가계가 좋지 못하더라도, 마음 편히 부모 개입 없이 사는 우리들이 더 나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내가 깨달은 그 이상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 듯한데, 안타깝게도 지금 나의 식견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저 나의 수준에 맞는 부분들만 이해하여 소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시선으로 내 수준에 맞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여기서 제일 뇌리에 남는 부분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성취감을 자녀의 교육적 성공만이 유일한 보상이 되어 더 희생해서는 안 된다.' 다.
나는 자녀들에게 집착하는 엄마가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래서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성장시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녀의 성공은 자녀의 성공일 뿐, 내 성공이 될 수는 없다. 자녀의 성공으로 대리 만족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의 꿈을 목표로 사는 삶이 더욱 값어치 있다 생각한다.
자녀의 삶은 자녀 그대들에게 주고, 꼭 해줘야 하는 것만 충족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녀의 삶도 한 번 뿐이듯, 내 삶도 한 번 뿐이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아까운 내 삶을 자녀에게 올인하고,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자녀의 성공으로 승리감에 취해 기세 등등한 부모들을 보면, 샘이 나기야 하겠지만, 어디 아프지 않고 바르게 자란 자식에게 만족하는 엄마가 되도록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