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산책

6화

by 금머릿

간편한 옷차림만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레도는 오랜만에 나무로 우거진 길을 가족들과 함께 걸었다. 분명 원하지 않은 외출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콧노래가 나왔다. 싱그러운 나무와 그 사이를 오가며 노래하는 새들이 잘 왔다고 반겨주는 것 같았다.


저마다 만족스러운 미소로 걷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레도는 행복감을 느꼈다.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시도가 자꾸만 옆구리를 찔러 댔다. 장난을 거는 거였다. 평소 같았으면 정색을 하고서 눈을 부라렸을 테다. 그러나 어쩐지 오늘은 그 장난을 다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쭈구리, 까분다 이거지?”


태권도 겨루기 시합을 할 때처럼 스텝을 밟으며 장난을 거는 시도에게 레도도 함께 스텝을 밟아 주었다. 그리고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레도가 위협적인 발차기를 해 보였다. 시도는 형이 오랜만에 자신의 장난을 받아준 것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얘들아, 그만! 지나가는 사람들 부딪히겠어!”


주의를 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세상 부드러웠다. 레도가 의아한 마음으로 엄마를 돌아보았다. 아빠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레도는 덩달아 활짝 웃었다. 나쁘지 않았다. 미세먼지 없이 깨끗한 공기 탓인지는 몰라도 속이 시원한 느낌이었다.


“앗!”


발등으로 형의 엉덩이를 가격한 시도가 까르르 웃으며 앞서 도망을 갔다.


“잡아 봐라!”


놀리듯 뱉은 동생의 말에 레도가 씽긋 웃으며 뒤를 따랐다.


“이시도, 각오해!”


으름장을 놓는 말이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기분 상하지 않은 말투였다. 순식간에 시도를 따라잡은 레도는 시도의 목에 헤드록을 걸었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눌러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까르르 웃음을 멈추지 않는 시도는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도와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새로 지어졌다는 분수대 앞까지 왔다. 화창한 날씨와 시원스럽게 솟구쳐 오르는 분수는 너무도 잘 어울렸다. 레도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솟았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게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 최신 게임에서 저런 배경을 봤던 것 같은데...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레도는 실물을 보면서 게임의 한 장면을 떠올렸고 그 자세로 넋을 잃었다.


“나오니까 좋지?”


다가온 아빠가 레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레도는 흠칫 놀라며 두 눈을 깜빡였다.


“저렇게 좋아할 거면서, 안 나왔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엄마의 핀잔에 레도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시도가 떨어지는 분수대에 두 손을 한껏 내밀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시도를 말리기 위해 걸어갔다. 아빠는 한참을 걸어오느라 곤한 다리를 펴며 뒤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레도는 아무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뿜었다.


뜬금없이 게임의 장면이 떠오르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가끔 그랬고, 친구들과 함께 놀이할 때도 종종 그랬다. 그럴 때마다 레도는 가슴이 철렁! 하기는 했다. 전혀 상관없는 곳에 있으면서도 그 장면들을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한심하게 여겨졌다. 정말 엄마 말대로 중독이면 어떡하지? 하는 염려가 들기도 했다.


‘하지는 못하고, 그리워만 해서 그래!’


레도는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엄마의 방해로 결론지었다. 실컷 하고 나면 오히려 생각이 안 날 것 같다. 엄마를 향한 원망이 더해진 가운데, 레도는 아늑한 자신의 소파에 앉아 게임을 즐기는 순간을 그리워했다.


“산책 다 했으면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요, 아빠!”


신나는 산책길이 갑자기 시시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레도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 떴다.


“아직 반도 안 왔어, 레도야.”


“반이 어디예요? 평소에 운동 안 하던 아빠 엄마 너무 무리하면 힘드실 걸요.”


레도는 아빠 엄마 핑계를 댔다. 시도와 자신은 오랜 시간 태권도로 단련이 되어 있는 다리라서 핑곗거리가 안 됐다.


“아무리 힘들어도 개관한 도서관에는 들러야지. 그냥은 못 가.”


어느새 시도를 설득해서 데리고 오며 엄마가 말했다. 레도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애써 집어삼켰다. 엄마가 얼마나 책에 파묻히기를 좋아하는지 레도는 안다. 그러나 레도는 엄마가 책을 좋아하는 만큼 책을 싫어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이 모여 있는 책을 펼치기만 해도 멀미가 나는 것 같다. 멀미를 일으키는 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도서관에 가면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다. 그러나 어서 이 시시한 산책을 마무리하고 아늑한 침대로 돌아가기 위해, 도서관은 필수 코스임을 레도는 잊지 않았다.


“그럼, 어서 가요, 도서관!”


레도가 앞장서서 도서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빠와 엄마는 서로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도는 다시 걷기 시작한 형에게 이번에도 장난을 걸기 위해 달려갔다. 그런데 레도는 아까처럼 시시껄렁한 장난에 장단을 맞춰 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만해.”


점잖게 일렀지만, 시도는 아까의 연장선이라 여기고 계속해서 장난을 걸었다.


“그만하라고!”


시도의 장난은 레도가 버럭 내지른 소리에 잠잠해졌다. 레도의 고함에 시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엄마가 시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엄마는 잠깐의 시간 동안 마음이 돌변한 큰아들의 처사가 매우 못마땅했다. 함께 놀자는 의미였을 뿐인데 동생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엄마는 이를 악물어 보인 다음, 레도에게 그 뜻을 표하려 했다. 그러나 레도를 막아선 아빠의 고개를 내젓는 모습에 엄마의 입은 열리려다 말았다.


“질, 풍, 노, 도.”


아빠는 레도가 저만치 걸어가는 모습을 힐끗 본 다음, 엄마에게 작게 속삭였다. 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이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거친 어투로 말대꾸를 할 때면 아빠는 늘 그렇게 속삭인다. ‘질풍노도’라고. 그러면 함께 분을 내려던 엄마가 신기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힌다.


“질풍노도가 뭐예요?”


시도의 묻는 말에 아빠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형은 지금, 강한 바람이나 성난 파도처럼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중이야. 이럴 때는 함께 몰아치는 것보다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게 더 나아.”


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알고 있어서 엄마는 한숨을 내쉴지언정 솟아오르는 분을 삼키곤 했나 보다.


“도대체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바깥바람을 쐬면 어릴 때의 그 명랑함이 되살아날 줄 알았어요. 그리고 분명 아까까지는 그랬잖아요.”


엄마가 걱정을 담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의 그 밝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데리고 나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여겼다, 리모컨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유치한 전략을 써가면서까지 데리고 나오기를 잘했다, 그만큼 형제의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했다, 도대체 저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차 있고, 저 마음에는 어떤 것이 들어앉았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불평을 다 들은 아빠가 엄마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주물러 주었다.


“가자, 여보! 당신이 좋아하는 도서관이네.”


큰아들에 대한 염려와 역정으로 종잇장처럼 구겨진 엄마의 마음을 아빠가 풀어주기 시작했다. 아빠는 정말로 엄마와 천생연분이 틀림없다.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빠 덕분에 시도는 걱정 한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1시간 정도 당신 모른 척하면 되지?”


도서관 입구에 다다랐을 때, 아빠가 말했다. 가족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레도가 비슷한 말을 했다.


“저도 1시간 동안은 찾지 마세요!”

“너, 어디 다른 데 있으면 안 돼!”


엄마가 다급히 레도에게 일렀다. 레도는 귀찮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엄마가 보이지 않을 열람실의 모퉁이를 돌아서 갔다. 그리고 구석진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도는 엄마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뭔지 안다. 그러나 엄마가 바라고 강요하는 만큼 레도는 책을 거부했다. 갓 돌이 지난 아들을 위해 백만 원 상당의 전집을 사 주었던 엄마다. 엄마 말에 의하면 레도가 어릴 때는 하루 종일 책을 가지고 놀았단다. 책을 빨기도 하고, 물어뜯기도 하고, 그림을 보기도 하고, 엄마가 읽어 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엄마는 찢어진 책에 투명 테이프를 함께 붙이면서 병원 놀이하던 때가 정말 즐거웠다고 했다. 어린 아들이 세 살 때 그랬단다. 찢어진 책에 테이프를 붙이고 토닥토닥 두드려 주면서, ‘책아, 미안해. 다시는 아프게 하지 않을게.’라고 말했단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감동이 되어 눈물이 났다고 했다.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 아들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영특한 아이였고, 온종일 책을 보면서 책의 내용으로 놀이를 하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하는 엄마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큰아들이 책 한 권을 진득이 읽고 그 의미를 깨우치며 세상의 바른 이치를 하나하나 배워가기를. 그래서 어쩌면 아들이 읽을 만한 이야기를 직접 쓰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도전한다는 동화공모전은 어쩌면 그런 바람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레도는 엄마의 바람대로 억지로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서 멀미를 일으키는 책을 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된다. 마침, 비어있는 창가 자리에서 창밖을 내다보자 파란 하늘에 한가로이 떠 있는 구름 몇 점이 보였다.


그 아름답고 깨끗한 하늘을 보면서 레도는 아까 떠올리던 게임의 한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정말 감탄에 마지않는 자연을 바라보면서도 게임의 장면이 떠오르다니. 아마도 게임의 해상도가 그만큼 실물과 흡사할 정도로 발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도는 간절히 바랐다. 어서어서 동화공모전 발표가 나고, 엄마가 당선이 되고, 유럽 여행을 떠나기를. 그래서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게임을 실컷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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