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모드 작동

9화

by 금머릿

레도가 직접 디자인한 아바타가 늠름한 모습으로 모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도는 성을 탈출하기 위한 신나는 모험에 앞서 아바타에 갖가지 아이템들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선물로 게임기를 받은 이래 1년 동안 틈틈이 게임을 하며 획득한 아이템들이었다.


언제나 레벨이 업그레이드되고 더 신나는 모험을 하려 할 때마다 레도는 게임을 멈춰야 했다.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는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틈날 때마다 부지런히 모아둔 아이템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들을 장착할 때마다 더욱 강해지는 아바타를 보자, 레도의 어깨도 함께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세팅이 끝나고 게임을 시작하려는 찰나, 갑자기 울려 퍼진 음악 소리에 레도가 화들짝 놀랐다. 요란한 음악 소리가 조용한 집안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음악은 ‘코시코스의 우편마차’?


엄마의 벨소리와 같은 음악이어서 레도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더욱 요동쳤다. 활기찬 그 음악이 너무 좋다며 휴대전화 벨소리로 지정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레도가 의아한 마음으로 거실로 나왔다. 기가마미가 특유의 상냥한 얼굴로 레도에게 다가왔다.


“기가마미!”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레도의 목소리가 묻혔다. 레도가 더 큰 목소리로 기가마미를 부르자, 그제야 음악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러나 기가마미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16시, 숙제할 시간이에요!”


“뭐?”


레도가 기가마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얼굴을 찌푸렸다. 기가마미는 자신이 전해야 할 말을 다 전하고서 상냥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레도는 잠잠해진 기가마미를 뒤로 하고 다시 게임기가 설치되어 있는 놀이방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어깨를 붙드는 손길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에는 기가마미와 레도 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레도의 어깨를 붙들었다는 것은 붙든 이가 기가마미임을 의미했다. 너무 놀란 레도가 돌아본 곳에는 표정 변화가 없는 기가마미가 서 있었다. 예상대로 기가마미가 오른손을 들어 레도의 어깨를 붙든 것이었다.


“기가마미!”


레도는 기가마미의 행동의 이유를 묻기 위해 기가마미를 불렀다.


“네?”


한결같은 대답.


“내 어깨를 왜 붙잡은 거야?”


“제가 그랬군요. 불쾌했다면 죄송해요.”


친절한 답변. 레도는 기가마미가 실수한 거라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레도는 게임기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기가마미가 두 손으로 레도의 어깨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기가마미!”


“네?”


“도대체 왜 자꾸 나를 붙잡는 거야?”


“죄송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레도는 헛웃음이 터졌다. 똑똑한 기가마미가 엉뚱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 레도는 아까 음악 소리와 함께 숙제할 시간이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며 기가마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혹시, 내가 방과 후에 해야 할 일이 입력되어 있어?”


“네, 이레도 님의 일정 모드가 작동 중입니다.”


레도의 입에서 세찬 숨이 거친 말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퇴근한 아빠에게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던 기가마미를 보면서 정말로 신기했다. 똑똑한 기가마미 덕분에 즐겁게 웃었던 순간이 지금은 이처럼 치가 떨리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못 말리는 엄마다. 엄마는 그 바쁜 와중에 아들을 구속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설정한 것이다.


“기가마미!”


“네?”


“당장 일정 모드 해제해.”


“죄송합니다. 일정 모드 해제를 위해서는 비밀번호 입력 후 재설정을 하셔야 가능해요.”


레도는 울상이 됐다. 황금 같은 시간인데, 다시없을 기회인데!


“기가마미! 그럼, 입력돼 있는 내 일정에 대해 말해 줘.”


“16시 숙제할 시간입니다. 18시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20시 태권도 학원 갈 시간입니다. 22시 취침 시간입니다.”


레도는 기가 찬 웃음을 내뿜었다. 언제나 엄마가 레도에게 강요했던 일정들이었다. 그러나 레도는 그 일정에 따랐던 적이 거의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거의 밖에서 배회하고 다녔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태권도 학원을 다녀와서야 겨우 숙제를 들여다보았다. 최근 2년간 22시에 잠이든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늘도 레도는 22시에 잠들 생각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성 탈출’은 꿈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기가마미! 난 일정대로 움직일 생각 없어. 날 내버려 둬.”


“방해가 됐다면 조용히 있을게요.”


그러나 레도는 기가마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까도 죄송하다고 했으면서 자신의 어깨를 붙들었음을 잊지 않았다. 레도는 기가마미의 전원 버튼을 찾았다. 게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전원을 꺼둘 생각이었다.


아빠가 기가마미를 켤 때 눌렀던 버튼의 위치를 기억해 낸 레도는 주저 없이 그 버튼을 다시 눌렀다. 떨어지는 음정의 가락과 함께 기가마미는 눈을 감았다. 레도는 씨익 하고 웃었다. 이젠 정말 게임에 집중할 수가 있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레도가 놀이방으로 들어가서 게임 시작 버튼을 눌렀다.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시작된 게임의 배경 음악 소리 때문에 레도가 듣지 못한 소리가 있었다.


“띠리리릭! 기가마미 임시 모드로 작동 변환합니다.”


기가마미가 다시 켜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레도에게 다시금 ‘코시코스의 우편마차’가 들려왔다. 레도가 이번에도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미 어두워진 방 안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였다.


레도는 두 시간여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에 빠져 있었음을 깨닫고 뻐근한 뒷목을 만졌다. 게임을 일시 정지 시킨 뒤, 레도는 방에 전등불을 켰다. 여전히 요란하게 울려대는 소리가 의아해 레도가 방 밖으로 나왔다.


레도는 저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캄캄한 거실에서 상냥하게 웃고 있는 기가마미의 눈이 번쩍였다.


‘분명히 껐었는데... 꺼진 게 아니었나?’


레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가마미에게 다가섰다. 기가마미는 여전한 표정으로 레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18시, 저녁 식사 시간이에요.”


레도는 흠칫 놀라서 기가마미를 돌아보았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섞어놓은 듯한 소리였다. 레도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끈 줄 알았던 로봇이 켜져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인데, 그 로봇의 목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기가마미,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이유를 묻는 레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제 목소리가 왜요?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마치 공포영화에 등장할 법한 목소리로 기가마미는 상냥하게 이야기했다. 레도는 끔찍한 기가마미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서랍에 넣어 두었던 사용설명서를 찾았다. 기가마미의 기능에 대해 궁금할 때마다 꺼내 보던 매뉴얼이 어째서 지금 보이지 않는지 레도는 초조했다.


그런 레도의 어깨에 또다시 기가마미의 손이 닿았다. 이번에도 레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기, 기가마미!”

부르는 말이 더듬거리면서 나왔다.


“네?”


“이번엔 무슨 일이야?”


“18시, 저녁 식사 시간이에요.”


기가마미의 답변에 레도는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해 둔 밑반찬과 국으로 상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레도는 감탄하거나 기가마미를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서 저 끔찍한 목소리를 꺼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배고프지 않아.”


“식사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죠.”


아무리 좋은 이야기여도 저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를 결코 달갑게 들을 수 없었다. 레도는 기가마미에게 다가가서 또 다른 버튼은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숙제를 다 했는지 확인이 되지 않았어요. 저녁 식사를 했는지 확인이 되지 않았어요.”


기가마미의 뒤를 샅샅이 뒤지면서 레도는 불평의 숨을 내뱉었다. 엄마는 일정을 입력하면서 그 일정을 다 완수했는지 확인까지 하도록 설정을 해 둔 모양이다.


“도대체 끄는 버튼이 어디 있는 거야?”


불평과 함께 여기저기를 살피는 레도에게로 돌연 기가마미가 돌아섰다.


“할 일을 하지 않는 이레도, 벌을 받아야겠어요!”


레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끔찍한 목소리로 엄마의 어투가 나왔다. 레도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기가마미는 레도의 두 손을 등 뒤로 모았다. 레도가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다. 그러나 기가마미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레도는 손목이 꺾일 것만 같은 통증을 느꼈다. 기가마미의 주머니에서 아빠의 운동화 끈이 나왔다. 그건 또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걸까? 기가마미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끈으로 레도의 손목과 발목을 꽁꽁 묶었다. 레도는 너무도 어이가 없는 이 상황에서 할 말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가마미는 그런 레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여전히 상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캄캄한 거실에서 홀로 번쩍이는 기가마미의 두 눈이 레도는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았다.


“기가마미, 뭐 하는 짓이야? 날 풀어줘.”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그래서 레도는 용기를 내어 외쳤다.


그런데 레도의 말을 들은 기가마미가 이상했다. 끼릭, 끼릭! 기계음이 여러 번 들리는가 싶더니, 기가마미의 눈에 불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레도가 의문을 가지고 기가마미를 관찰했다. 고장이 난 걸까? 아님, 배터리가 다 된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의 기가마미로 돌아와서 자신을 풀어주는 것보다, 배터리가 다 되어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저 끔찍한 목소리를 더 듣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다음 일정을 알려줄 때까지 대기할 작정인지 기가마미는 선 자세에서 더 이상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기가마미를 긴장된 마음으로 바라보는 레도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지기 시작했다.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숙제를 하지 않고,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받는 벌이 아니다. 동생이 아픈 것을 기회로 여기고, 내 욕심을 채우려고 했던 것에 대한 벌인 것만 같았다. 레도는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거실 바닥에 누워서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고 있었다.


“미안해, 시도야....”


사과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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