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궁, 경복궁에 다녀왔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쌀랑한 공기가 버겁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러나 낮에는 기온이 제법 오르곤 하니,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챙겨 입었고, 일교차가 큰 것을 대비해 카디건 하나를 걸쳤다. 며칠 전 월요일(19일),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의 짐을 기숙사까지 실어다 주기 위해 아침 일찍 나선 길이었다.
목적한 일을 끝냈으니 경기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봄날이었다. 나는 경기도에서 20년을 거주하면서도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고궁에 가보기로 했다. 말로만 듣고, 매체를 통해서만 보았던 조선 시대 왕을 위해 지어진 공간. 언젠가 가볼 날이 있겠지, 하며 미루다 보니,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아직 오전 중이라 날씨가 쌀쌀했고, 주말의 빠듯한 일정 때문에 피곤이 겹겹인 상태였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조선 시대 왕의 생활 공간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상황을 음미해 보자, 라는 마음으로.
서울에 있는 5개의 궁인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중 월요일에 휴무가 아닌 궁은 경복궁 하나였다. 경복궁이 휴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 여기며 즐겁게 걸음을 옮겼다. 화요일이 휴무인 경복궁에는 현장 체험 학습을 온 청소년들과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밀집되어 제법 붐비고 있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광장에 다다랐을 때, 가슴 한구석에서 이름 모를 뜨거움이 꿈틀댔다.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수많은 국민이 이곳에 모여 목소리를 높였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역사의 장소인 곳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기분이 남달랐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경복궁은 ‘하늘이 내린 큰 복’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글을 보았다. 수없이 들었던 그 이름에 그런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줄 처음 알았다. 조선 왕조가 개국 4년에 처음으로 세운 으뜸 궁궐이라니 관람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상승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품고 있는 등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훌륭한 곳에 위치한 한양의 중심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예부터 한반도의 중심지라 인정받은 곳에 발을 디디고 선 기분이 가히 나쁘지 않았다. 마치 나 스스로가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없어진 적이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그로부터 10여년 흐른 1610년에 제2의 궁궐인 창덕궁이 재건되었지만, 경복궁이 무려 270년 이상 폐허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주요한 건물들을 일렬로 놓아, 왕조 국가인 조선의 상징 축으로 삼았던 경복궁이 그렇게 오랜 시간 폐허였다는 사실이 참 마음 아팠다. 그로 인해 더욱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관람에 임하게 되었다.
도착한 시간이 오전 11시 즈음이어서 때마침 시작되는 행사를 관람할 수 있었다. 광화문 앞에서는 매일 2회(오전 10시, 오후 2시)의 ‘수문장 교대 의식’이 행해지고 있으며, 파수 의식도 1일 2회(오전 11시, 오후 1시) 행해지고 있다.
수문장 교대 의식은 조선 시대 왕궁의 정문(광화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이 정해진 시간마다 교대로 임무를 바꾸는 절차를 재현한 전통 의식이다. 또한 파수 의식은 이 수문장들이 광화문을 경계하며 파수(순찰, 경계)를 서는 상황을 재현한 의식이다.
전통 복장을 갖춘 수문장과 군사들이 등장하여, 매우 정교한 절차에 따라 진행된 의식은 연주되는 북소리만큼이나 엄중하게 느껴졌다. 문을 지키기 위해 업무 교대를 하고, 순찰하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기에 이리도 엄숙하고 진중하게 진행이 되는 걸까?
의아한 마음이 들다가도, 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궁극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엄중한지가 느껴져 의식을 보는 내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세 방향을 둘러싸며 관람하는 내국인과 외국인들의 호의적인 눈빛을 보아하니, 나만의 느낌은 아닌 듯했다.
높은 빌딩 숲 한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궁은 참 여러 가지로 위로와 힘을 주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도심 속의 자연, 복잡하고 어지러움 속에서의 고요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고요 속에서 깊이 있는 사유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추천하고 싶은 장소이다.
경복궁의 역사를 기록한 연표를 보며 그 가치가 더욱 와닿았다. 1395년 경복궁 창건,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로 훼손, 1990년이 되어서야 복원 사업이 시작, 1997년 조선총독부 철거, 2010년 광화문 복원과 1차 복원 사업 완료까지의 나열은 경복궁이 현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존재하기까지 참으로 파란만장한 시간을 꿋꿋이 견뎌내었음을 알려 주었다.
주요 사건 곳곳에 등장한 ‘왜’라는 나라의 개입은 입안 살점을 잘근 씹게 만들었다. 이웃하고 있는 나라의 선하지 않은 문화재 훼손은 명백한 악행이며, 일어나서는 안 될 아픈 역사이다. 그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경회루와 그 주변을 바라보며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관람객이 많았지만, 감상에 방해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자잘한 소음들이 고요한 과거의 시간과 동적인 현재의 시간을 아우르며, 마음의 평안을 자아냈다.
다음에는 아이들과 함께 와봐야겠다. 그때는 나도 다른 관람객들처럼 위아래 한복을 차려입고 궁내를 걸어보면 어떨까 싶다. 우리의 전통 옷을 갖춰 입고서 고궁을 걷는다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입장료 3천원을 아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당당함을 더욱 가슴에 새길 수도 있지 않을까.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와중에 공기는 따스해졌고, 카디건을 벗어야 했다. 마치 차가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듯, 경복궁은 한없는 온기를 나에게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