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기가마미가 전화를 받았다. 레도는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엄마 영상은 이미 멈춘 채였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레도는 한껏 귀를 기울였다. 조용한 집안이어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누군지 식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네, 20시 태권도 학원에 갈 시간이에요. 레도는 태권도 학원에 가지 않았어요.”
레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저녁 8시, 태권도에 갈 시간이 이제 막 지나고 있었다. 영상을 보는 동안 알람은 작동되지 않았다. 시간 지키는 것을 늘 강조하던 사범님이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레도가 궁금해서 집으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사범님, 도와주세요! 저 지금 집에 갇혀 있어요! 저 좀 구해주세요!”
레도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전화선 너머에 있는 사범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온 힘을 다해 외쳤다. 그러나 기가마미는 통화를 끝내 버렸다.
“소리를 지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에요.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8시가 지나면 이웃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엄마의 설정이 분명했다. 레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마미를 통해서 엄마의 왜곡된 속상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레도는 차분히 대답했다.
“알았어. 조용히 할게.”
그리고 레도는 가다듬은 목소리로 기가마미를 불렀다.
“기가마미!”
“네?”
“누가 전화를 건 거였어?”
“태권도 사범님이었어요.”
역시! 레도는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기가마미를 불렀다.
“사범님이 뭐라고 하셨어?”
“안녕하세요? 레도가 체육관에 오지 않아서 연락드렸습니다. 라고 하셨어요.”
기가마미는 사범님의 어투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어?”
“네.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어요.”
레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기가마미의 답하는 소리를 장난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구해 달라!’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레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희망 하나가 사라졌다. 꼼짝없이 내일 아침까지 이대로 있어야 하나?
내일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지 못하면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오겠지? 하지만 그때도 선생님이 자신의 외침을 듣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레도는 갑자기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엄마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엄마 대신 엄마 로봇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던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아픈 동생과 함께 엄마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게임에 정신이 팔렸던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후회해 봤자, 도움 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레도는 자꾸만 후회가 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레도는 엄마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코맹맹이 소리를 들어도 좋고, 엉덩이를 토닥여도 좋고, 잘 좀 하라고 핀잔을 주어도 좋다. 제발 나타나서 아픈 손목과 발목을 풀어주고 기가마미 대신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너무 어렵다며 눈물짓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레도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배가 고픈데다가 기가마미 때문에 놀란 바람에 피곤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빠, 어서 오세요. 시도야, 미안해. 엄마... 보고 싶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레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레도야, 이레도! 일어나 봐, 레도야.”
에이, 코가 맹한 소리. 벌써 아침이 왔나? 레도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역시나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어? 그런데 엄마의 얼굴이 이상했다. 눈 주변이 빨갛게 변한 걸 보니, 적잖이 눈물을 쏟았나 보다. 왜 울었을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헉! 레도는 다시 두 눈을 번쩍 떴다. 시도가 맹장 수술을 한다고 했는데....
“엄마, 시도에게 무슨 일 있어요? 수술 잘 안 됐어요?”
레도는 가슴이 벌렁거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엄마는 말없이 레도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레도가 의아한 마음으로 덩달아 엄마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응? 레도는 자신의 손이 자유롭게 엄마의 등을 만지고 있음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손에 묶여 있던 끈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레도는 엄마의 어깨 너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범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레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는 동민이와 동민이의 엄마가 염려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 더 둘러보았지만 기가마미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 기가마미는요?”
엄마는 눈물 대신 자꾸만 콧물을 훌쩍였다.
“미안해, 레도야. 엄마가 미안해.”
그러면서 엄마는 자꾸만 레도를 품에 꼬옥 안았다. 레도는 정말로 오랜만에 엄마의 품에 안겼다. 이토록 따사로운 엄마의 품을 그동안 왜 그렇게도 거부했던 걸까? 레도는 엄마를 마음껏 끌어안았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왠지 따가운 시선 때문에 레도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앞에서 동민이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 눈치 없는 녀석, 못 본 척하면서 고개를 좀 돌려주면 좋을 텐데. 뜻대로 되지 않는 친구 때문에 레도는 엄마를 슬그머니 밀어냈다.
“저는 괜찮아요. 시도는 괜찮아요? 기가마미는 어딨어요?”
레도는 쑥스러움을 몰아낼 만한 질문을 마구 던졌다. 엄마는 자신을 밀어내는 아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도는 장염이래. 입원 중이고, 아빠가 곁에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으잉? 장염? 맹장염이 아니고?
“기가마미는 전원을 꺼서 다용도실에 넣어 두었어.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사용설명서를 더 꼼꼼하게 읽었어야 했나 봐.”
엄마는 기가마미가 어떠한 오류를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오류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은 아닌지 자꾸만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내일 기사가 와서 가져갈 거야. 엄마가 기가마미만 믿고 널 혼자 두어서 정말로 미안해, 레도야.”
“아직 체험 기간이 남았는데 그냥 돌려보내게요?”
“당연하지! 너에게 이런 짓을 했는데! 사범님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잖아.”
엄마의 말에 레도는 뒤에 서 있는 사범님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알겠다. 사범님은 레도의 도와 달라는 말을 들으셨다. 그리고 동민이에게 연락해서 집의 위치를 알아내고서 와 보신 거다. 엄마에게 연락한 사람은 동민이 엄마였다. 레도는 감사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기가마미가 왜 너에게 이런 거지?”
엄마는 늘 상냥하던 기가마미가 아들의 손목과 발목을 묶는 이런 어이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도는 갸웃거리는 엄마에게 웃어주었다.
“그냥 안 좋은 기억은 다 잊어요, 엄마. 앞으로는 제가 잘할게요.”
엄마는 달라진 레도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어쨌든 아들이 어릴 때의 명랑함을 되찾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는 그걸로 됐다고 여겼다. 그리고 다시는 기계 따위에게 소중한 아이를 맡기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다.
“안녕, 기가마미....”
레도는 기가마미와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움에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