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인생 드라마 ‘미지의 서울’
설캉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설날’의 ‘설’과 ‘바캉스’의 ‘캉스’가 합쳐져서 ‘설 연휴에 여행을 떠나거나 휴식을 즐기는 것’을 줄여서 말한다고 한다. 이 말은 2020년대 초반, 특히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신조어다. 그런데 이 말이 요즘 함께 글쓰기를 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바로 ‘설거지’의 ‘설’과 ‘바캉스’의 ‘캉스’가 만나, ‘나 혼자 설거지하면서 바캉스를 즐기는 것’으로 쓰이는 것이다. 설거지하면서 어떻게 휴식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OTT 앱이 깔린 기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즉, ‘실제로는 노동 중이지만, OTT 콘텐츠 감상을 통해 마치 바캉스처럼 느끼는 주방 시간’이라 정의될 수 있다.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고, 누가 대신해 주었으면 좋겠고, 자꾸만 미루게 되는 설거지. 설캉스를 알게 된 뒤로 주부로서 나의 노동 시간은 아주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설거지. 식기세척기를 사용하지 않아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시간. 그 시간에 흥미로운 콘텐츠, 특히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 보게 된 것이다.
OTT 앱을 실행할 수 있는 휴대폰을 개수대 위 선반에 올려놓으면 준비 끝이다. 그릇을 내려다봐야 할 때는 소리로 내용을 따라가고, 손의 감각만으로 비누칠과 헹굼을 할 수 있을 때는 화면을 바라본다. 수돗물이 흘러나올 때는 소리가 묻히는 경우가 많지만, 자막이 나오니 얼마든지 내용 파악을 할 수가 있다.
그렇게 1년 정도 날마다 설캉스를 즐기던 나에게 설캉스로 만족할 수 없는 드라마가 나타났다. 바로 박신우 감독, 이강 극본의 ‘미지의 서울’이다. ‘미지의 서울’은 얼굴 빼고 모든 게 다른 쌍둥이 자매가 인생을 맞바꾸는 거짓말로 진짜 사랑과 인생을 찾아가는 로맨틱 성장 드라마다. 지난 5월 24일부터 6월 29일까지 12부작으로 tvN에서 방영되었다. 또한 티빙과 넷플릭스에서도 스트리밍되었다.
주말에 일정이 많아 본 방영 시간에 시청할 수 없는 나에게 ‘미지의 서울’을 스트리밍해 주는 OTT 플랫폼은 참 고마운 존재였다. ‘미지의 서울’은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힘겨운 현실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다 보니, 2,30대 자녀를 둔 여성들뿐만 아니라, 실제 그 나이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쌍둥이가 서로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게 된다는 설정 자체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연기하며 사는 동안, 더욱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끝내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과 정체성을 찾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러한 스토리가 진행되는 가운데 주옥같이 쏟아지는 힐링의 대사들은 도저히 설거지하며 대충 들을 수 있는 말들이 아니었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뭔가를 숨길 땐 이유가 있어. 그걸 파헤칠 때도 이유가 필요하고.”
“조금이라도 좋은 거, 기쁜 거, 즐거운 걸 잡아요.”
“사랑이라는 건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백 번이라도 천 번이라도 옆에서 함께 지는 게 사랑이야.”
이와 같은 대사들은 한번 귀로 들어왔지만, 절대로 한 귀로 빠져나가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고, 내 인생에 적용하게 했고, 끝내 그 위로가 나에게 닿는 결실을 맺게 했다. 특히, 3년간 방구석에 갇혀 지냈던 미지(박보영 분)를 밖으로 이끌기 위해 할머니(차미경 분)가 했던 말은 아마도 앞으로 내 모든 삶의 순간, 꺼내어 귀를 기울일 말이 될 것이다.
“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사우는 거잖아. 미지도 살려고 숨은 거야. 암만 모냥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다른 사람이 볼 때, 내 삶의 순간순간이 볼품없게 느껴지더라도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생을 위한 모든 선택은 ‘급이니, 수준이니’ 하는 말로 평가받기 이전에 우선 존중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한 전제 아래에서 모든 생명과 존재는 그 의미를 갖게 될 테니 말이다.
드라마가 종영되었고, 배우들이 자신이 연기했던 캐릭터에게 작별을 고하는 모습도 영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이 드라마와의 이별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숨을 쉬고 살아가는 내 삶 곳곳에서 그들이 했던 말들이 넌지시 위로와 힘을 여전히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드라마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것일 테다. 나는 아직 ‘미지의 서울’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아픔을 간직하고서도 끝내 활기참과 용기를 잃지 않았던 미지(박보영 분), 완벽을 추구하는 시간 동안 병들었지만 결국 회복을 이루어내고 만 미래(박보영 분), 두 인물이 단단해지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행복에도 도달한 호수(박진영 분)와 세진(류경수 분). 그 외의 다른 배우들의 역할 역시, 어느 하나 아쉽거나 모자람 없이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였던 인물들.
그들의 이야기는 자극적이거나, 요란하지 않았다. 잔잔함 속에 흐르는 그 힐링 요소들이 더욱 나를 몰입시켰다. 거부할 수 없는 힐링의 폭포수였으며, 잔잔함의 저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내 ‘인생 드라마’다.
‘미지의 서울’은 설거지하는 도중에 보는 것이 아닌, 설거지 전후에 시간을 내고, 마음을 열어서 보게 한 드라마다. 마치 내 인생을 그렇게 정성껏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를 시청했던 시간을 ‘설(거지)캉스’가 아닌, ‘설(서울)캉스’라 이름해보면 어떨까 싶다. 위트 넘치는 어느 지인은 ‘미지의 경기도’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며 우스갯소리를 던지기도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