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차가운 수술대에 오르지 않으리라(2)

망각의 선물(2)

by 금머릿

그 즈음하여 주변에 있던 지인들에게서 자주 듣게 된 말이 있었다.


“꿀이 아주 뚝뚝 떨어지네. 딸이 그렇게 갖고 싶어?”


나는 너무 놀랐다. 내가 그런 눈을 한 줄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나의 시선을 앗아간 아기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아기들이었다. 지나가는 여자아기들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너무도 사연 있어 보인다는 주변 분들의 말에 나는 늘 화들짝 놀라곤 했다.


“무슨 소리예요? 딸 키울 역량이 안 돼서 아들만 둘 주셨는데, 셋째는... 어우, 그런 말씀 마세요.”


늘 손사래를 치고, 고개를 흔들기 바빴다. 아무리 여자 아기가 예뻐 보여도 셋째라니. 친정 언니들 중에 누구도 셋을 낳은 사람은 없었다.


친정과 400km나 떨어져 사는 내가 둘 키우는 것도 언니들은 늘 대단하다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셋을 키운다? 아무도 내다보지 못했던 일이었고, 나 역시 꿈꾸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셋째를 낳게 되었고,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딸을 갖게 되었다. 셋째를 임신한 것을 알고,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 담당의는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제왕절개를 두 번이나 했기 때문에 넷째는 안 돼요.”


입이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수술이 세 번째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수술로 아이를 낳으면 둘째까지밖에 낳지 못한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참, 그랬지... 수술하면 다산할 수 없는 거였지. 그 깨달음도 셋째가 생기고 나서야 오게 되었다.


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그나마 셋까지는 가능하다는 거였는데, 안되는 거였으면 어떡할 뻔했나? 아찔했다.


놀란 마음에 ‘아, 그런 거예요?’라는 반응을 보였더니, 의사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이 엄마, 큰일 나겠네. 넷은 안 되니까 이번에 아기 낳으면서, 나팔관 묶는 수술도 같이 하면 좋겠네요.”


아.... 늘 남편에게 피임을 위한 수술을 하고 오라고 말했었는데, 결국 우리의 피임은 셋째를 낳으면서 내가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 수술대에 나는 좀 더 오래 누워있어야 했고, 더 많이 수혈해야 했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 정말로 너무 힘들었다. 솔직한 표현이다. 정말 힘들었다. 숨 쉴 틈이 없는 사람처럼 얼른 날이 지나기만을 바라며 꾸역꾸역 하루를 보내는 날이 이어졌다.


첫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우울감조차 찾아올 틈이 없었다.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 재우고. 나의 하루는 온통 아이들이었다.


약 2년간 딱하게 여긴 친정엄마가 집에 머물며 도움을 주시기는 했지만,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신 뒤로, 나의 삶은 그야말로 헉헉대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그 기간에 남편과 1년간 주말 부부를 해야 했고, 큰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했으며, 작은 아이는 놀이 중에 사고가 나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목을 8바늘 꿰매는 수술을 해야 했다.


세 아이는 서툰 엄마의 보호 아래, 늘 돌아가면서 병치레를 했고, 울지 않기 위해 꾹꾹 참는 엄마의 과장된 웃음 앞에서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자라났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엄마였지만, 다스리지 못한 감정의 파편을 맞으며 아이들은 적지 않은 아픔을 느꼈을 터다.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참 후회되는 면면들이 있다. 나의 사진앱에는 당시 아이들의 모습이 참 많이 담겨 있다. 사진과 영상 속에는 아이들의 예쁨, 귀여움, 사랑스러움이 치사량만큼 담겨 있지만, 나의 고됨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잘 견뎌온 탓에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은 아무리 담아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망각했기에 누릴 수 있었던 출산의 기쁨. 그 기쁨이 고통보다 수십 배, 아니 수천 배가 되기에 우리는 자녀를 더 낳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고통을 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 선물과도 같은 일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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