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_만약 모든 사람의 손에서 스마트 기기가 사라진다면?
1.
뭐야? 무슨 일이야? 나의 분신처럼 함께하던 너. 가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존재 자체를 잊을 때가 있긴 했지만. 그건 네가 언제나처럼 그곳에 있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였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리 찾아도 넌 이미 사라지고 없어.
2.
너만이 아니네? 모두의 손에서 너의 동료들이 사라졌어.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서 아이들이 다 사라진 동네처럼 세상이 허전해. 어쩔 수 없이 TV를 켜야겠어. 저것 봐, 이미 뉴스에도 나오잖아. 원인 모를 일이 일어나고 있어. 다섯 식구 다 자기 휴대폰이 있으니, TV를 없애려고 했는데, 게을렀던 게 다행이지 뭐야. 보지도 않는 TV의 수신료를 그만 내고 싶었는데, 미루기를 잘했어.
3.
당황하는 사람들. 안절부절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어. 출근하고 등교해야 하는데, 버스가 오는 시간을 확인할 수 없어. 택시를 부르지도 못해. 빼박 미리 나가서 기다리는 수밖에. 하필 비까지 오네. 이건 뭐 세상을 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4.
한 가지 안심되는 건 있어. 운전 중 빨간 불일 때, 남편이 폰을 들여다보지 않을 거 아냐. 늘 그게 불안하고 걱정이었는데, 아무리 잔소리해도 고쳐지지 않는 일이었는데, 그 걱정 하나는 덜었네.
5.
어? 그러고 보니, 글을 쓸 도구가 사라져버렸네. 하아... 어쩔 수 없이 공책과 샤프를 꺼내야하잖아. 얼마 전 둘째의 요구에 구입했던 스프링 공책이 묶음 판매여서 다행이야. 아이들 필기용 샤프를 12자루 1다스짜리를 사서 여유분이 있어 좋네. 빈 노트를 펼치고 샤프를 달각 누르는 이 기분... 뭐지? 마치 중학교 때로 돌아간 기분이야. 틈만 나면 깨알 같은 글씨로 세상을 만들어내던 때.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스토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지우개로 쓱싹 지워버리면 되었던 때. 글씨가 반듯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쓸 맛이 안 나. 으아, 그 강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그런데 왜 이리 정겹고 코끝이 찡하지?
6.
쿠*에서 식재료를 주문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마트로 걸어갔어. 비 오는 날, 나가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 근데 의외로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고요해지는 기분이야. 민생지원 소비쿠폰으로 결제했지만, 결제 내역을 확인할 수 없어. 얼마가 남았는지 몰라서 답답해. 체크 카드의 계좌에 잔액이 얼마인지 이제는 기억해 두는 습관을 가져야겠어.
7.
400킬로 떨어져 계신 친정엄마께 전화를 걸었어. 엄마네도 우리 집도 집 전화가 남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하마터면 연락도 못 할 뻔했어. 비 오는 오늘, 기온이 차니 감기 조심하시라는 말을 전할 수 있었어. 스마트 기기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에 살면서, 이런 아날로그 기기들을 유지하고 있었다니. 누군가는 선견지명 아니냐며 추켜세울 수도 있겠지만, 아까도 언급했듯이 순전히 게으름이 원인이야.
8.
기껏 식재료를 사다 놨는데, 딸아이가 그러네.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순간 배달앱을 사용할 수 없어서 당황. 하지만 나는 곧 회심의 미소를 지었어. 우리 동네에는 전화로 주문받는 중국집이 하나 있어. 난 그 가게의 단골이고, 집 전화로도 얼마든지 배달 주문을 할 수 있어. 배달앱으로 주문할 때보다 훨씬 친근하게 직원과 소통할 수 있고, 배달도 즉시 되어서 너무 좋아. “오늘도 나무젓가락과 단무지 빼 드리면 되죠?” 동, 호수만 듣고도 우리의 루틴을 알아주는 주인장이 참 정겨워.
9.
아우, 시끄러워. 예상치 못한 소음이 발생하고 있어. 저녁 시간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느라 지극히 짧았던 우리의 대화가 길어지고 커진 거야. 오랜만에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대화할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이러다간 층간 소음으로 민원이 발생할 것 같단 말이지. 안 되겠어. 하루 마무리를 빨리하고 불을 꺼야지. 카톡이나 인스타 DM이 없으니, 아이들도 굳이 늦게 잘 이유가 없나 봐. 순순히 잠잘 준비를 하네. “내일부터는 공부를 하든지, 책을 봐야겠다.” 헐... 너무 지루한 나머지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다니! 이런 환상적인 진행은 정말 예상 못 했어.
10.
매우 아쉬운 점이 있어. 연재하던 나의 소설이 더 이상 소통할 수 없게 되었어. 도전하던 공모전도, 온라인 상에서 함께 글을 쓰던 공동체도, 모두가 올스톱이야. 어떡해ㅠㅠ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우린 서로의 연락처를 기억하지도 못한 채 생 이별을 하게 되었어. 수기로 글을 쓰고, 우편으로 문서를 보내는 방법밖에 없어. 아, 정말 불편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하긴 하지만... 폰아, 그냥 돌아와 주면 안 되겠니? 앞으로는 내가 정말 좋은 방향으로다가, 유익하게 잘 쓸 테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사라지길바랄때도있었다
#하지만이렇게갑자기는아니다
#없어도살수있을거라고믿는건
#시대착오적인객기가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