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하지 않는 삶에 대해(4)

‘스갱 아저씨의 염소’ 인문적 읽기, 불가능의 가능성, 초인의 탄생

by 김요섭


불가능의 가능성


그림책으로 돌아가 봅시다. 블랑게뜨 앞에는 악마의 뿔처럼 솟은 검은 산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림 아래쪽을 보면 늑대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칠흑 같은 밤, 블랑게뜨는 홀로 검은 산을 마주합니다. 야생의 밤에 던져진 염소가 어떻게 도망치지 않고 늑대와 맞설 용기가 생겼을까요? 여러분은 야산에 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늑대가 없는 나지막한 산이라면 괜찮으시겠어요?


블랑게뜨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역사를 돌아보면 비슷한 상황이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를 떠올려봅시다. 각성된 농민은 막강한 화력의 일본군이 버티고 있는 우금치에서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항복한다면 탐관오리의 폭정은 여전할 것이고 게다가 일본의 지배 아래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지요. 잠시나마 집강소를 통해 연대하며 자유를 누렸던 존재로서 노예의 삶으로 회귀는 용납할 수 없었지요.

일본군의 기관총이 빗발치는데 죽음을 향해 돌진한 수많은 동학농민군. 그들의 처절한 싸움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전투의 겉만 보면 일방적 학살이었기에 무모하고 불필요한 희생이라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정신을 가진 이의 존엄한 선택으로 해석한다면 납득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맛본 사자의 정신은 더 이상 낙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인의 탄생


블랑게뜨는 돈키호테처럼 검은 벽을 향해 돌진합니다. 이때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늑대의 반응이 재밌습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염소가 늑대에게 돌진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약한 존재에 선입견을 가진 늑대의 반응은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이 아닐까요?

블랑게뜨는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와 관념을 돌파하기 원합니다. 보통의 염소가 아닌 것이지요. 이미 염소라는 존재를 넘어서버린 블랑게뜨는 ‘초인(Ubermensch)’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늑대와 밤새도록 싸우는 것이지요. 블랑게뜨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스스로에게 외칩니다.

제발 새벽이 될 때까지 만이라도 버틸 수 있기를....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고통 없이 죽고 싶지는 않을까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아 보이는 싸움을 블랑게뜨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싸우기 위해 잠시 휴전한 틈을 타서 풀을 뜯기도 하지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에게 주어진 생명을 위해

죽음마저 긍정하고 다시 한번,

생의 긍정을 위한 치열한 전투.

아모르파티(運命愛).

'계속해야 한다.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할 것이다.' - 사무엘 베케트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블랑게뜨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죽음 앞에 파괴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지도, 회피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숙명 앞에 당당히 맞섭니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다 뜯겨버리고만 노인은 지친 채 항구로 돌아옵니다. 뼈만 앙상히 남은 청새치는 파괴되어버린 존재의 문학적 형상화를 이룹니다. 노인의 흐려지지 않는 눈빛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지 않는 정신을 보여주지요.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처절하게 파괴되면서도 생을 긍정하다가 죽는 존재. 헤밍웨이의 주인공은 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블랑게뜨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새벽까지 싸우다가 완전히 소진된 채 죽어버리는 염소는 노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토록 처절하게 고독한 전투를 감내하다가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파괴되었지만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우리는 작품을 통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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