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하지 않는 삶에 대해(3)

‘스갱 아저씨의 염소’ 인문적 읽기, 니힐리즘과 아모르파티, 위버멘쉬

by 김요섭


데카당, 타락한 정신


묶인 채 살던 이가 갑자기 도래한 자유의 시간을 살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존재의 실력이 부족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쭐하고 과잉된 채로 자신의 현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은 위험한 것이 틀림없지요. 야생의 밤은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블랑게뜨에게 피할 수 없는 시간이자 존재의 함량을 증명해야 할 시간이지요. 죽음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산을 덮기 시작합니다.


위험의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도움의 손길이 동시에 다가옵니다. 스갱 아저씨가 애타게 블랑게뜨를 찾고 있는 것이지요. 어둠에 홀로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블랑게뜨의 마음은 흔들립니다.

앞서 언급한 정신의 변화 단계를 다시 떠올려 봅시다. 낙타의 상태에 있던 존재가 사자의 정신, 즉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고 홀로 서기로 했을 때 고양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주체적 존재로 변화했더라도 어느 순간 불완전한 상태를 직시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존재의 함량이 부족하다면 노예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의 변화단계는 결코 불가역적인 진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인지라 언제든 나약해질 수 있고, 과거로 회귀할 수 있는 존재이지요. 니체는 이러한 상태를 ‘데카당’ 즉 타락한 정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블랑게뜨는 처절한 실존의 위기 앞에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자유의 대가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 사자의 정신을 획득한 블랑게뜨.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울타리를 넘었지만 대가를 치러야 함은 미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울타리 밖을 선택한 이상 먹이부터 잠자리, 안전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하지요. 목줄을 끊고 자유롭게 뛰놀며 만끽한 해방감은 이제 고립감과 두려움으로 블랑게뜨를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자신을 구속하던 목줄과 울타리가 그립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오히려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부자유로 변해버린 역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가 배태한 아이러니에 주인의 품을 떠올리는 연약한 마음을 비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데카당적 상황은 블랑게뜨만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블랑게뜨는 마지막 유혹의 목소리를 어렵게 이겨냅니다. 연약한 염소지만 사자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면의 혼돈 가운데 찾아낸 작은 빛으로 짙은 두려움을 밝히기 시작하지요. 다시 줄에 묶이는 노예의 삶보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 여기'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서두의 편지글에서 언급된 것처럼 선택에 따르는 대가를 이제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치닫습니다.

늑대가 나타난 것이지요.



능동적 허무주의와 위버멘쉬


늑대 앞에 홀로 선 염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말입니다. 오히려 고통 없이 빨리 죽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요? 하지만 블랑게뜨는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죽음을 목도하고 있지만 비관적 전망 속에 함몰되지 않지요. 찰나의 삶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겠다고 결심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은 파괴될지라도 말입니다. 블랑게뜨는 이전의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 위버멘쉬로 거듭납니다.


이 부분에서 잠시 멈추고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블랑게뜨가 아닌가요? 비관적으로 보면 우리는 늑대를 만나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허무주의적 전망 속에서도 인생에게는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라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한 번뿐인 삶을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와 맞서서 자신을 넘어서는 삶을 살 것인가의 선택은 다릅니다. 예술과 문학의 정수를 접하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절대적 타자를 그저 받아들일 것인가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치열하게 자신을 넘어서기를

기꺼이 대가를 치르며 사는 존재가 되기를.

다시 한번 운명을 긍정할 수 있기를,

'아모르 파티'(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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