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유럽의 한적한 시골 마을 스갱 아저씨의 농장에서 시작됩니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전원생활이지만 아저씨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키우는 염소마다 줄을 끊고 산으로 도망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학대한 것도 아니고 나름 좋은 사육환경을 제공했다고 여겼지만 하나같이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것에 말 못 할 상처가 있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이들이 모두 늑대에게 잡아먹혀 버린 것을 알고는 그는 더 이상 염소를 키우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결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깨뜨려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염소를 보게 된 아저씨는 그만 집으로 데려오고 맙니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농장에 들인 일곱 번째 염소를 위해 ‘블랑게뜨’라는 예쁜 이름도 지어줍니다. 이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아저씨는 더욱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요. 목줄을 최대한 늘려주고 보다 나은 사육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세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블랑게뜨 역시 이전의 염소처럼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멍하니 울타리 밖을 바라보며 싱싱한 풀과 예쁜 꽃 사이를 마음껏 뛰어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요. 안온한 평화, 주인이 허락한 폭과 범위에서만 인정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자각의 순간이 지나자 이전까지 맛있던 풀도, 아저씨의 따뜻한 배려도, 의미가 없다고 블랑게뜨는 느낍니다.
정신의 세 가지 변화
목줄과 울타리를 억압으로 느끼게 된 블랑게뜨의 생각의 변화에서 니체라는 철학자가 떠올랐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유명한 주제인 ‘정신의 세 가지 변화’라는 부분 말입니다. 현대 철학과 예술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친 니체 사상의 핵심 중에 하나인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언급해보겠습니다.
니체는 말인의 인간에서 초인으로 변화하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단계로 ‘낙타, 사자, 아이’를 언급했습니다.
'낙타'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단계, 즉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외부의 명령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에 반해 '사자'는 낙타였던 존재가 자신의 처지를 각성하고 더 이상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존재를 상징하지요. 남의 명령으로 사는 낙타의 단계를 지나서 자신에게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림책으로 돌아가 봅시다. 블랑게뜨는 낙타의 삶 즉,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아저씨의 은폐된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 결정으로 어떤 위기가 도래할지 혹 생명까지 위험해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산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라는 블랑게뜨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사자의 정신은 홀로 서겠다는 자유의 정신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정신의 성숙이 온 블랑게뜨에 비해 어쩌면 스갱 아저씨는 여러 번의 상처에도 성장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주인으로서 전형적인 반응을 보이고 말지요. ‘철없는 녀석! 산에는 무시무시한 늑대가 있어. 이전에 힘세고 난폭한 염소 르노드조차 늑대와 싸우다 결국 잡아먹혔다고!’ 하지만 아저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블랑게뜨는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산으로 가고 싶어 하지요. 니체식으로 이야기하면 '목숨을 건 도약'과 같은 정신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블랑게뜨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저씨는 극단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여섯 번의 실패 이후 맞이한 아름다운 염소 블랑게뜨를 자신의 방식으로만 사랑했기에 외양간에 자물쇠를 채워 가두고 말지요. 사랑하는 대상에게 구속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심리상태는 우리도 익히 경험하기에 낯설지 않습니다.
아저씨의 바람과는 달리 블랑게뜨의 마음은 가두려 하면 할수록 자유를 갈망하게 됩니다. 욕망은 금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주인은 모르고 있지요. 블랑게뜨의 마음이 에릭 바튀의 인상주의적 그림에도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이전 페이지에서 보였던 평온한 초록색은 온데간데없고 검은 벽을 마주한 채 온통 붉은색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블랑게뜨가 그려져 있습니다. 바닥에는 자유를 갈망하며 긁은 흔적도 보입니다. 아저씨는 자신의 삐뚤어진 사랑의 감정을 자물쇠를 두 번 채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맙니다.
매트릭스의 밖
하지만 금기가 강할수록 욕망이 더 커지듯 우연히 창문이 열린 것을 알게 된 블랑게뜨는 쉬지도 않고 바로 산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산에 있는 친구들은 희고 아름다운 블랑게뜨를 환영합니다. 모두 친절을 베푸는 터에 블랑게뜨는 기쁘기도 하고 우쭐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 것 같습니다. 화려한 초록색 숲, 하늘로 쭉쭉 뻗어 있는 붉은 나무 줄기는 마치 블랑게뜨의 우쭐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목을 감은 줄도 없고 ‘너는 이렇게 해야만 해’라고 명령하는 주인도 없는 탁 트인 언덕에서 홀로 풀을 뜯고 있는 블랑게뜨의 모습은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무엇이든 가능한 존재로 변한 듯 묘사되어 있지요.
블랑게뜨의 정신은 과잉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비해 상황을 낙관적으로 과신하고 있지요. 이는 다음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산을 활보하지요. ‘언덕에 오른 블랑게뜨의 발아래 놓인 아저씨의 집은 너무도 작아 보였고,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살았을까’ 하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힘과 능력의 고양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작아 보인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이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 것이지요.
인식의 한계와 현실
이 지점은 인문학이든 예술이든 공부하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오랜 과정을 통해 축적한 예술과 문학의 정수를 접한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변화가 시작되어서 어느 정도에 이르게 되면 자신이 보통 사람들보다 우월하며 보다 고양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습니다. 뭔가 조금 알 때가 실수하기 좋은 시기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인문예술의 정수를 접하게 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장과 함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아무리 평생 공부하고 익힌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과 깊이를 일부 밖에는 알 수 없다는 것. 인식의 한계라는 인간의 조건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게 되지요. 다시 말해 자신의 현존재의 한계와 약함을 인정하게 되는 단계가 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깨닫기 전의 과잉 상태는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속의 블랑게뜨가 처한 상황과 마찬가지로요.
무리에 속한 야생의 검은 영양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면서 블랑게뜨는 일시적으로 구원받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구원도 잠시, 결국 홀로 남게 됩니다. 블랑게뜨에게 실존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이 넓은 들판에 던져진 듯 묘사된 그림에 암시됩니다. 낮이 배경이었던 그림 역시 해 질 녘으로 바뀌게 되지요. 블랑게뜨는 비로소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한낮의 고양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우쭐함과는 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양 떼의 방울소리’가 평온하게 들릴 정도로 블랑게뜨의 마음은 약해져 버리고 맙니다. 아니나 다를까 큰 매가 머리 위로 지나가자 블랑게뜨는 놀라서 몸을 떨고 말지요. 이때 ‘우우’하는 늑대의 울음소리마저 들려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