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작품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려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블랑게뜨처럼 현실을 산다는 것은 웬만한 존재 실력 가지고는 흉내내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작은 영웅의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는 우리의 속내는 다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는 스갱 아저씨의 안온한 울타리를 욕망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고 드라마나 소설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작품 속 인물은 우리의 숨겨진 욕망이 투영된 희생양일지도 모릅니다.
'멋진 책을 읽고 감동할 수 있으면 된 것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채 책을 덮는 것이지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하지만 작품은 소비되고 마는 상품이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책을 대하는 방식이 결국 내면의 불편한 것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히틀러가 도서관의 책을 불태우며 공포정치를 일삼을 때, 저 방식대로 곧 사람을 태울 것이라 생각했던 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책을 그저 덮어버린다면 히틀러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불편한 진실에 마음을 여는 것은 불가해한 존재, 낯선 이를 환대하는 일일 것입니다.
불가해한 존재, 낯선 이라는 어감이 혹시 불편하신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라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해받지 못하고 낯선 존재는 우리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뭉뚱그려서 보기만 하고 세밀하게 볼 줄 모르는 이에게 성장은 요원합니다. 주변에 약한 존재, 무용한 것을 대하는 방식이 곧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은 운명이 된다.' - 칼 융
자신을 다시 호명하라
세계적인 복싱 선수였던 무하마드 알리의 본명은 원래 ‘캐시우스 클레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종차별이 만연한 당시 미국에서 흑인의 처지를 깨닫고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말지요. 왜냐하면 클레이는 백인 소유주의 성이었고 캐시우스 역시 주인이 붙여준 이름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림책 표지를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스갱 아저씨의 염소'라는 책의 제목이 어떻게 읽히시나요? 블랑게뜨가 '스갱 아저씨의 염소'인가요? 여러분도 이미 아시다시피 염소 너머의 존재인 블랑게뜨는 더 이상 '스갱 아저씨의 염소'가 아닙니다. 또한 아저씨가 붙여준 이름인 블랑게뜨도 아니겠지요.
미지의 이름, 아직 불러볼 수 없지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어떤 이름으로 호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잊지 않으면 언젠가 그 이름을 찾게 될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카타르시스적 희생양으로 소비한 채 책을 덮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