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주인공은 우량아로 태어나더니 점점 더 커진다. 청년이 된 그가 도시로 들어오는 장면은 진격의 거인처럼 거대한 크기로 묘사되어 있다. 도시의 높은 빌딩은 그의 허리 아래로 빼곡히 그려져 있다. 거대한 빌딩을 왜소하게 만드는 거인의 등장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이들은 전투기, 헬기를 출동시킨다. 기생충을 박멸하듯 그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누구나 환원될 수 없는 꿈의 크기를 간직한 채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사는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은 개인에게 요구합니다.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세요, 합리적인 사람이 되세요.'라고 말입니다.
예측 가능한, 합리적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고정관념처럼 규격화되어 있지요. 사유하지 않더라도 다음 행동이나 선택을 가늠하는데 지장이 없게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러한 일을 지속적으로 경험한다면 최초의 꿈은 온전히 발현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이미 알다시피 시스템 속의 개인의 꿈은 자유롭게 피어나기보다 규격화되고 포획되기 쉽습니다.
'아니 창의적 인재를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을 원하는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무슨 소리인가요?'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창의력이나 새로운 생각은 시스템의 수용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사회마다 용인되는 폭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체제의 범주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요. 범위를 벗어난 창의력, 새로움은 낯선 것일 뿐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요. 제거해야 될 면역학적 타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어두운 밤길 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경우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리스 아테네의 강도였던 프로크루스테스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납치해서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자르고 혹 작으면 늘여서 죽였지요. 그의 몹쓸 짓은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신화 속 그는 죽었지만 그의 침대는 사라졌을까요?
그림책으로 돌아가 봅시다. 도시 문명의 랜드마크인 빌딩 속으로 침입해온 낯선 거인의 등장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까요? 그의 손과 발짓에 그들의 합리적인 시스템이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은 공포였을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체제를 지키기 위해 온갖 무기를 동원하는 것으로 그림책에 묘사되어 있지요. 작은 이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인은 공격받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부정적이며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기만 할까요? 저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혹시 그의 크기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주기 때문은 아닐까요? 작아져버린 이들의 어린 시절, 환원될 수 없던 존재의 크기를 기억하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지기 전을 떠올린다면 현재 자신의 모습은 어떻게 인식될까요? 부끄러움 이후에 혹시 분노의 감정이 찾아오지는 않을까요?
'아니 아직도 거인이 있다니?'라며 침대에 맞게 자르려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거인인가요?
여러분은 그림책을 보면서 어떤 모습에 더 공감이 가시는지요? 갑자기 도시로 난입한 주인공인가요? 아니면 도시를 방어하는 작은 존재들인가요? 물론 많은 분들이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어디에 더 가깝나요?'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거인으로 상징되는 낯설고 부정적 존재를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한 적은 없었나요? 아니면 고정관념의 폭을 벗어난 사람이 공동체에서 외면당하고 억압받을 때 방관한 기억이 들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상처 받는 일이 잦다면 아직 자신의 고유성을 고민하고 있는 징후겠지요.
어찌 되었건 체제 안의 삶은 어느 편에 서있든 상처 받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주었던 상처가 거인이었던 종족을 왜소하게 만든 것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