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 언어의 형태(4) : 최적화

한병철 읽기(14), 10월 26일 단상

by 김요섭



최적화


최적화는 이미 규정된 곳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다. 울타리의 부분이 되고 싶다는 점에서 괴상한 패티시즘이며, 유한성의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는 반동적 욕망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워 팔다리를 잘리기 원한다는 점에서 마조히즘이기도 하다.

최적화는 바깥이 없다. 현존재를 넘어서는 불가능한 욕망은 그것에 기입되어 있지 않다. 아무리 최적화하더라도 최적화되지 않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바쁘게 일을 관리하지만 존재의 허기, 헛헛함은 수시로 밀물처럼 밀려들 수밖에 없다. 도저히 최적화되지 않는 불완전연소의 찌꺼기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성과 주체는 우울하다.


다름이 사라진 곳에 질문도 사라진다. 최적화는 동일성의 언어다. 왜 그곳에 배치되어야 하는지 의문은 없고, 그래야만 하는 시스템의 언어만 있다. 성과사회에서 체제의 언어는 주체의 언어로 위장된다. 최적화는 지배의 언어임에도 성과 주체의 '할 수 있음'으로 언어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가 아님에도 자기 것인 양 불나방처럼 매달린다. 스스로 빛나지 못하기에 시스템의 불빛에 매달린 결과, 날개가 타버리고 만다. 자신을 매질한 결과, 무의미한 죽음은 성큼 다가오고 만다.


최적화는 컨베이어 벨트 상품 같은 인간을 만든다. 가장 효율적인 속도를 위한 같음의 요구는 존재의 물화와 연결된다. 배송의 효율을 위해 나온 사각형의 박스처럼 인간의 몸은 규격화되기 시작한다. 식스팩, 보톡스, 브라질리언 왁싱을 하며 매끄러운 상품처럼 자신을 위치시킨다.


일반적이고 모방적 소비를 하는 그도 남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지 않다. 쇼윈도에 상품처럼 전시되어 화려한 조명 아래 있고 싶은 것이다. 혹 더 나은 욕망이라고 한다면, 명품관에 전시되는 것 정도가 아닐까? 성과 주체의 최고의 욕망이 결국 교환되는 상품이라는 점에 최적화는 위치한다. 그러나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작품은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최적화된 인간은 거대한 매트릭스의 부분이 되는 것, 의문 없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당연시한다. 생존을 위해 자기 주도적으로 최적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반대다. 시스템은 매트릭스의 속으로 그를 매끄럽게 참여시킨다. 배터리 부품의 일부가 되길 원하는 그의 목에 연결선을 꽂아 넣는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캡슐 안에 그는 끼워진다. 시스템과 합일되며 분리된 존재의 헛헛함을 일소시킨다. 그는 꿈 없는 잠을 잔다.


왜 최적화해야만 하는가?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응답해야 할 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은 우리 속에 흐르며, 숙주와 만날 때 힘을 발생시키는, 기관 없는 신체로 있기 때문이다. 혈액과 같이 우리 몸을 타고 흐르며, 미학적 신체를 바꿔놓았기에 질문을 하는 것부터 만만하지 않다. 중세로 가는 열차를 탔다는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지젝은 지배 없이 자행되는 폭력, 자기 착취를 불러오는 폭력,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한다... 몸을 최적화해야 한다는 강압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덮쳐온다. 최적화의 강압은 보톡스, 실리콘, 에스테틱의 좀비뿐만 아니라 근육질, 근육강장제, 피트니스 좀비도 양산한다. 성과사회는 도핑 사회이기도 하다. 계급과 성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소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성과의 좀비, 건강의 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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