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 그것은 해방하는 자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자의 이름이다....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 의욕할 수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슬픔이다.' -니체
의지
의지는 내면의 불이다. 그것은 도전하는 주체의 열정과 관계한다. 존재에 닥친 사건이 어려울수록 힘에의 의지는 더욱 커진다. 니체는 '위대한 적을 가지라'라고 했다. 존재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길 수 없는 적을 가진다면 더욱 좋다. 끝없이 싸우고, 넘어지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성숙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적은 너무 만만하다. 해결이 어렵거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 경우 회피하거나 도망쳐버리고 만다. 눈을 껌뻑이며 주위에 있는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는데, 시간과 열정을 소진하고 만다. 바쁘게 살았고,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존재가 비어버린 것 같은 헛헛함. 성과 사회를 사는 주체의 잔인한 단면이다. 한병철의 문장으로 순간을 포착한다면 '셀카의 피 흐르는 뒷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파리채가 되는 것이 당신의 운명이어서는 안 된다'
억압된 무의식이 클수록 불은 더 세게 타오른다. 칼처럼 불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무의식의 지각에 쌓인 강한 응력은 언젠가 커다란 진동을 동반하며 의식의 수면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억압된 힘을 단번에 무너져 내리게 해서는 곤란하다. 거대한 지진에 존재도 같이 산산조각 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회로를 열어주는 몽상이 필요하다. 바슐라르가 했듯 무의식이 승화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일이 중요하다. 창조적 상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억압된 무의식을 잘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위대한 예술가, 창조하는 자의 억압은 승화의 방식으로 작동되며 해결되었다. 반대로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망상으로 치닫게 된다. 강한 응력은 어느 순간 거대한 지진해일로 나타나 존재를 삼키고 말 것이다.
빈약한 의지는 유한성과 관계하며, 불가능한 의지는 무한성과 연결된다. 유한성의 언어는 울타리를 가진다. 적당함, 위험하지 않음, 안온함이라는 한계가 이미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유한성만 아는 자의 도전은 매번 그 수준으로 반복된다. 투명한 막처럼 천장이 보이지 않아서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 주체의 프로젝트가 전형적인 형태일 것이다.
반면 불가능한 도전에 쓰러지는 일은 무한의 열정과 맞닿는다. 언제 올지도 모를 타자를 기다리고, 꺼지지 않도록 촛불을 준비하는 일이다. 심지가 타버리면 얼른 다시 태우는 끈기와 무한자는 관계한다. 불가능한 꿈을 지속하는 유한자에게 무한은 어느 순간 도래한다. 지독한 유한성의 울타리를 훌쩍 넘을 수 있게 만든다. 순간, 그는 성과 주체라는 목줄을 끊어내며 독수리처럼 날아오른다.
의지는 시간과 관련된다. 내면의 불은 영원히 탈 수 없다. 내재성의 강도는 육체의 시간을 넘어서 의욕할 수는 없기에 언젠가는 파괴되고 만다. 시간의 의지에 항상 쓰러지고 마는 것이, 주체의 의지이다. 그러나 장기전은 항상 패배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단기전은 해볼 만하다. 유한자의 생에서 단 한 번의 전투는 결코 승산이 없지 않다.
다만 시간의 욕망과 맞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도 높은 의지가 필요할 뿐이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쏟아붓는다면 시간, 죽음, 운명 같은 재앙의 아름다움과도 상대 가능할지 모른다. 알퐁스 도데는 동화 '스갱 아저씨의 염소'에서 늑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염소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흰 염소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늑대의 시간에 맞서 새벽까지 싸운다. 편하게 죽을 수 있음에도 굳이 새순을 뜯으며 다시 한번 죽음과 맞선다. 순간, 불가능은 일시적으로 지연된다. 유한자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가능성일 것이리라.
인간의 시간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전투를 벌이는 일, 그것이 '의지'다.
'그 때문에 나는 인간들 사이에서 마치 인간들을 모르는 것처럼 장님으로 살고 있다. 나의 손이 확고부동한 것을 잡고 있다는 믿음을 전적으로 잃어버리지는 않기 위해서다'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