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
장 뤽 낭시 읽기, 10월 27일 단상
한 문장을 쓴다. 지운다. 몇 단어를 쓰다가 다시 지웠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맴돈다. 문득 블라인드 사이로 창 밖을 쳐다본다. 고층 아파트의 좁은 틈으로 놀이터가 보인다. 벚나무 세 그루, 빨간 미끄럼틀, 파란색 그네가 무채색의 아파트를 뚫고 들어와 있다. 아이 혼자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다.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깝지 않지만, 즐거운 표정이 전해진다. 창문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다. 몇 번이고 질리지 않고 계속하는 아이를 바라본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 문단을 쓴다. 여전히 무엇인가 없다. 새 창을 열었다. 다시 쓰고, 지우길 반복한다. 검은 글씨로 흰 여백을 채우는 것, 너머의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핸드폰이 울린다. 짜증이 불같이 밀려온다. 작업할 때 폰을 옆에 두지 않는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자신만의 패턴, 곳곳이 균열 나 있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미리 보기 창에서 흐르는 작은 메시지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작가님, 마감일이...' 출판사 에디터의 문자다. 그녀에게서 사라진 불은 이상한 곳에서 활활 솟는다.
허공에 잠시 멈칫했던 손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책상에 넙죽 엎드린다. 하마터면 폰을 던질 뻔했다. 그것은 밝은 보라색 등을 내놓은 채 숨을 죽인다. 24개월 할부가 두 달 반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한다. 확실하지 않아야 할 것이 명확해지며 그녀를 괴롭힌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 '빌어먹을,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해'라고 생각하다가, '아니야 그때, 청축으로 하지 말고, 적축 키보드를 선택했어야 해'라고 되뇐다. 괜히 키보드를 툭 밀치며 화풀이한다. 엉덩이를 쭉 빼고 의자를 밀어 반쯤 기댄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모니터 화면은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원망스럽다.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다 잊어버린 것 같다.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다. 글자 너머에서 오던 통로가 산산이 부서져버린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 않다. '하긴 이유를 안다고 해서 고쳐질 것도 아니지'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그녀는 체념한 듯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린다. 밝게 빛나는 화면과 달리, 내면을 달구던 불덩이 하나가 쑥 빠져나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문득 아랫배가 저릿하게 아프다. 아직 주기가 아니지만 곧 시작될 것 같다.
그녀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
책상 언저리에 있는 빨간 책을 펼친다.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한다.
'글쓰기란 악마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두들겨 맞고, 거의 산산조각이 나는 대가로 주어지는 달콤하고 경이로운 보상이다'
카프카의 문장이다. 두려움으로 인해 잠들 수 없을 때 글을 썼던 그에게 쓰기가 없었다면 삶은 정신이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난 두들겨 맞고, 산산조각 난 정도는 아니지 않나?' 자문하지만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문장을 다시 곱씹으니 다르게 읽힌다. '그렇다면 지극한 고통을 더 당해야 한단 말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심한 것 같다. 그녀는 키보드를 앞으로 당긴다.
몇 단어를 쓰다가 멈춘다. 다시 쓰다가 지운다. 막막하고, 답답하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초대받지 못한다. 쓸 수 없는 감옥에 갇힌 것만 같다. 갑자기 하복부에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신호가 온다. 급히 화장실로 간다. 주기보다 3일이나 빨리 도착한 것이 그녀를 빠져나간다.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은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그녀는 서재로 향하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열심히 문장을 짓더라도 되지 않는 어떤 것, 잠시 열린 그곳을 통해 도래했다가 멀어지는 것을 생각한다. 오직 그 피가 묻은 문장으로 다시 씌어야 한다. 진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쓰고 싶다고 써지는 것이 아님을. 의지의 문제를 넘어선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열림의 순간이 도래하기를. 에로스의 도래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녀는 느리게 자신의 배를 어루만진다.
'그 행동은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 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 수동성은 열림과 같으며, 도래하게 내버려 둠 또는 존재하게 내버려 둠과 같고, 우리의 생산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 우리와 무한히 보다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