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서늘한 바람이 해안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바다 저편에는 하얀 알바트로스가 크게 원을 그리며 날고 있다. 포후투카와 나무는 절벽에서 열 걸음, 검은 숲이 끝나는 경계에 있다. 푸른 잎사귀 위로 풍성하게 얹힌 선홍색 꽃다발은 하늘을 향해 활짝 펼쳐졌다. 그는 나무줄기 사이로 비치는 붉은빛에 눈을 떴다. 온몸이 땅에 푹 내려앉은 느낌이 든다. 눈을 껌뻑이다가 조심스럽게 팔다리를 움직여 본다. 얻어맞은 것처럼 곳곳이 아프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 자신의 발을 보고 깜짝 놀란다. 곰팡이가 낀 것처럼 푸르스름하다. 그가 무릎을 구부리자 바닥의 이끼가 함께 꿈틀거린다. 고개를 비스듬히 보니 발등 아래가 녹청으로 덮였다. 그냥 이끼라고 하기엔 기묘하다. 긴 줄기를 가진 것이 마치 발가락과 이어진 것처럼 늘어진다. 발을 더 들자 끝까지 떨어지지 않으려던 것이 툭툭 끊기며 살점이 찢긴다. 파랗게 질린 그의 발에서 선홍색 피가 터져 나온다. 그는 발등을 잡고 누른다. 쏟아진 피는 바닥의 이끼 사이로 스며들더니 순식간에 사라진다.
먼바다는 오후의 햇빛에 하얗게 질렸다. 아득하게 보이는 파랑 사이로 뿌연 포말이 인다. 그는 절뚝거리며 해안 절벽으로 걸어간다. 내려다보기도 아찔한 수십 미터 높이의 해안 절벽은 깎아지른 듯 펼쳐져있다. 멀리서 알바트로스가 다가오고 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표정으로 자신을 향하더니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고 다시 솟구쳐 오른다. 그는 급히 고개를 숙인다. 왼쪽 갈비뼈 아래쪽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절벽으로 떨어질 뻔했다.
그는 반대편 검은 숲을 바라본다. 그곳을 지나온 기억은 없다. 그렇다고 절벽을 타고 왔을 리도 없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순간 숲의 체취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그를 향한다. 갑자기 숲 전체가 그를 향해 밀려드는 것 같다. 아찔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는다.
숲으로 들어간다. 푸른 이끼가 아름드리 전체를 감싼 카우리 나무를 지나친다. 곧이어 너도 밤나무 사이로 사람 팔보다 긴 고사리가 곳곳에 펼쳐져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시퍼런 고사리가 그의 몸을 훑는다. 점점 그를 향해 긴 촉수를 뻗는 것 같다. 그들을 뿌리치며 길을 치고 나가지만 바닥을 덮고 있는 거대한 고사리 군락을 벗어날 수 없다. 짙은 초록의 손길이 그를 기다렸다는 듯, 잎 꼬리를 슬쩍 말았다가 펼치며 팔을 늘린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는 뛰기 시작한다. 온통 초록의 지옥이다. 도저히 방향감각을 잡을 수가 없다.
여러 번 넘어졌다가 손으로 고사리를 치며 다시 일어났다. 고사리는 여전히 그를 향해 기운다. 그들의 집요함에 점점 지쳐간다. 날은 점점 저물어간다. 초록빛을 띠던 고사리는 검게 그을린다. 옆으로 누운 햇살이 점점 길어지며 그의 시야는 좁아진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다. 카우리 나무뿌리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을린 손이 얼굴을 스치며 다가온다. 검푸른 자국이 묻은 것은 팔다리를 만진다. 사방에서 도착한 것이 그의 몸을 감싼다. 수천 개의 푸른 촉수는 그를 더듬는다. 드디어 검은 숲의 밤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