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아름다움, 푸코처럼
김준산 읽기(8), 11월 5일 단상
'광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자질을 가져야 한다.' -푸코
무한의 파편으로서 광기
광기는 유한자에 기입된 무한의 파편이다. 바깥으로부터 날아온 백린탄(白燐彈)을 맞았으나, 죽지 않은 인간은 그것을 품는다. 극단의 부정성은 결코 동화되지 않는다. 주체의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편린은 그녀의 심연 깊숙이 꽂힌다. 비록 날아온 곳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이나, 시스템에 속한 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자 아름다움이다.
영혼의 조울증은 그을린 흔적이다. 그녀는 불가해한 계시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받들었다. 그토록 낯선 것을 품지 않을 수 없었기에, 재앙을 잉태한 그녀는 아직 화형대에 오르지 않은 마녀가 된다.
감당할 수 있는 순간이 없지 않았으나, 도저히 감내할 자신이 없다. 자신도 모르게 불쑥 솟구치는 열기를 어찌할 수도 없다. 끝없이 상승하는 격정은, 순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는 털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시체처럼 널브러졌다. 비정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은 홀로 곡선의 시간을 사는 이의 고통이다.
광기는 극단을 허용하는 이미지 능력이다. 작은 죽음은 그녀를 무한의 폭과 깊이로 이끌었다. 죽었기에 누구보다 살아있는 모순을 품는다. 그 폭과 깊이를 살아내느라 집단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작은 죽음은 한병철이 말하는 좀비와 언뜻 비슷할지 모르나 전혀 같지 않다. 성과주체는 광기를 모른다. 그는 매끄러움, 적당함, 협애함으로 무장한 좀비다. 유한성의 틀에 갇힌 삶을 살 뿐, 바깥을 알지 못한다. 시스템의 아비투스를 자기 것인 양 동일시하기에 바쁠 뿐이다. 개별성을 넘은 단독성을 모르기에, 무한의 심도와 폭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광기의 이면
광기는 개별성 너머의 가능성이다. 타자가 도래한 흔적을 가진 자만이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광기는 살갗을 파고들어 가서 태우는 네이팜탄 같다. 제대로 승화되지 못하면 존재자 전체가 타버리고 만다. 아름다움의 형식을 입지 못하면 존재는 다시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만다. 그녀의 언어는 길을 잃고 무의식의 깊은 늪을 유령처럼 헤맬 것이다.
재앙일 수도, 진정한 아름다움일 수도 있는 광기는 무한의 유일한 통로다. 시인은 찰나의 순간 열린 문으로 들어가 불을 훔쳐본다. 그녀는 존재를 깡그리 뒤흔드는 위험 속에도 계속할 뿐이다. 타버린 흔적을,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급히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한의 언어로 환원 불가능한 것에 그녀는 고통받는다. 상징을 통한 우회로를 열 수밖에 없다. 부재의 현전도 가능하지 않은 여분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 그녀는 망실한 표정이다. 그녀는 다른 일을 알지 못한다. 광기를 품은 마녀는 작은 화형을 기다릴 뿐이다.
'이 책의 탄생 장소는 보르헤스의 텍스트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에게 존재물의 무질서한 우글거림을 완화해주는 정돈된 표면과 평면을 모조리 흩어 뜨리고 우리의 매우 오래된 관행인 동일자와 타자의 원리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오래 불러일으키고, 급기야는 사유, 우리의 사유, 즉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지리가 각인되어 있는 사유의 친숙성을 깡그리 뒤흔들어 놓는 웃음이다. -푸코 '말과 사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