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문장(4)

11월 6일 단상

by 김요섭



선배는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깊숙이 빨았다가 내뱉었다. 인호는 무언가 부조리하다고 느꼈는데, 어디서부터 인지 어떤 연유인지 생각해도 뚜렷하지 않았다. 근로장학생으로 연구자료 수천 장을 복사할 때의 피로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대상이 없는 무력함은 복사기의 직접적인 열감보다는 공중에 미세하게 흩뿌려지는 토너 입자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오전 내내 복사를 했지만, ‘창문 좀 열고 해라’라는 조교 선배의 핀잔에서 느껴지는 억울함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상하게도 조교 선배의 얄미운 말에는 즉각적인 분노가 올라왔는데, 그 선배에게는 어떤 즉발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현곤의 열정적인 강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에너지를 뺏는 사람은 가차 없이 도려내야 해. 네가 공무원이 돼봐 사람은 얼마든지 생겨. 합격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팁! 합격하려면 될 때도 하고, 안될 때도 해야 해. 그걸 꼭 명심해!”

에너지를 뺏는 사람이 조교 선배였는지 아니면 지바겐을 타던 선배였는지 뚜렷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들이 인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조교 선배는 얄밉기는 했지만, 개인적 부탁을 할 때는 도시락을 사주거나, 책 사라며 용돈을 주기도 했다. 지바겐 선배와는 과사무실에서 사무적인 대화를 한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인호가 짝사랑했던 여자 후배가 지바겐에 타기는 했지만, 그와 선배의 관계는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인호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의 부조리함을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담배 연기처럼 경로를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은 그를 점점 무감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증오의 대상이 있다면 편할 것이었다.

공무원 준비를 시작하며 인호는 학교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도서관이 시설도 좋고, 스터디 하기에도 적합했지만, 무엇인가 집중을 방해한다고 느꼈다. 막연하게 퍼져있는 기운은 과방의 대화에서나 스터디 모임에서든, 각진 콘크리트 건물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었다. 힘이 빠지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인호는 조현곤의 강의를 들으며 확실히 깨달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러면 나만 손해야’ 그는 더 이상 에너지를 뺏기는 일에 관심을 가지거나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단호해진 그는 우유부단할 이유가 없었다. 막상 학교를 떠날 때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짐했다. ‘도서관과 집, 집과 도서관, 심플하게 가자!’ 집에서 멀지 않은 그곳은 낡고 볼품없었지만, 신축 아파트 단지 덕에 뭐든 좋아지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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