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 자신의 불일치, 바흐친 읽기

미하일 바흐친 읽기, 11월 8일 단상

by 김요섭



'인간의 진정한 삶은 그가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지점에서, 즉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참된 의사를 무시한 채 몰래 엿보고, 정의하고, 예단할 수 있는 그런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존재로 만드는 그 모든 것을 벗어나려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바흐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


나는 나 자신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계속 분리된다.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라캉)이 우리의 삶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불일치는, 이유도 모르고 지속되는 불안과 연결된다. 그의 뭉툭하고 투박한 언어는 분리감을 더한다. 자신의 상처를 언어화할 방도는 찾을 길이 없다. 결국 극히 일부만을 자신이라 여길뿐이다. 배재된 존재로 인한 불완전연소는 감내해야 하나, 쉽게 감당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연성은 우발성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필연성에 기입되는 우발성은 기표와 기의의 일치 가능성이다. 도래하는 타자만이 유한의 울타리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의 그는 기다림의 강도를 가질 수 없다. 타자라는 우발성보다는 확실한 필연성을 믿을 뿐이다. 쉬운 선택을 한 그는 선입견과 편견, 고정관념의 울타리 어딘가에 머무른다. 해야만 하는 것을 하고, 해오던 것을 관성적으로 처리할 뿐이다.


필연성의 삶을 사는 이는 노예와 다르지 않다. 그는 존재를 바꿀 사건을 만나더라도 알아채지 못한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회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름다움을 감각할 세밀함과 다성적 언어를 갖추지 못했기에 존재는 생존할 뿐, 완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지배 없는 총체성으로서 폴리포니아(바흐친)는 그에겐 불가능에 가깝다. 다성악이 연주되게 하는 새로운 언어는 필연성의 죽음 이후에 온다. 결국 그에게 완전연소는 불가능으로만 남는다.



폴리포니아의 가능성


존재를 물화시키는 지점을 찾는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자신은 기계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다. 그러면 나를 사물처럼 대하고, 강화시키는 존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그것이 거대한 시스템이라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말이다.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해도 존재가 사라지는 과정을 언어화하는 것마저 불가능하지는 않다. 오직 불가능에 다가선 것만이 기표와 기의를 일치시킬 수 있다.


직선의 고착된 시간을 벗어나려면, 곡선의 시간성을 지향해야 다. 시스템에 갇힌 원인을 찾았다면, 벗어날 수 있는 우발적 사건을 기획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고통을 감내한 시간만이, 내적 강도가 곡선의 시간을 살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독한 시간을 잃어서는 안 된다. 풍크툼의 사건이 자신에게 '대화적으로 침투'할 수 있게 한다. 자기가 '스스로 열어 보일 수 있는' 시간이 진정 자유로운 시간이며 미끄럼 없이 자신과 합일하는 순간이다.



'한 인간의 진정한 삶은 대화적으로 침투할 때에만 접근 가능하다. 인간은 그런 대화적 침투에 대해 응답하면서 자유롭고 그 자신이 스스로를 열어 보이는 것이다.' -바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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