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을 향해

윤리와 무한 읽기(2), 레비나스 강독, 12월 16일

by 김요섭


네모 : 성서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라는 두 가지 사유 방식이 선생님에게는 어떤 식으로 조화될 수 있었는지요?


레비나스 : 종교적 삶과 전례와 같은 참신성과 더불어 해석학을 엿보고 느끼는 것은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비록 성서 주제들의 구체성이 철학의 지면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더라도, 읽는 행위를 통해 해석이 발생하는 장소인 위대한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은 제가 보기에 성서와 대립하기보다 오히려 성서와 가깝습니다. 다만 저는 처음부터 철학이 본질상 무신론적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았고, 지금도 철학이 무신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략) 문구에 담긴 신은 텍스트의 그 모든 신인동형론적 은유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에게 정신의 척도로 남을 수 있습니다.



1.

레비나스의 읽는 행위는 '부재하는 참된 삶'이다. '부재하는'의 의미는 무한성과 연결된다. 그것은 유한의 울타리 속에 갑자기 도래하고 사라져 간 불꽃의 흔적이다. 지극한 사랑은 극단을 허용하는 이미지로 무한한 아름다움을 쏟고 사라졌다. 바깥이 없다면 갇힐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그도 모르는 몫을 선사한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에 주체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성간 천체가 사라진 후에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그러나 '오우무아무아'는 태양계 바깥, 무한을 향해 지금도 계속해서 사라져 간다. 최초로 인터스텔라의 사건을 맞이한 천문학자처럼 그는 그곳을 향한다. 부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이처럼 바라볼 뿐이다.

레비나스가 자신의 철학을 말하듯 그것은 '타자를 지향하는 언설'일 수밖에 없다. 철학은 로고스의 언어로 그곳을 지향하는 일인 것이다.


2.

성서적 사유가 철학함과 만나는 지점은 지향성에 있다. 차안(此岸)의 세계로의 현실에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자에게 성서는 저 너머의 피안(彼岸)의 세계를 선물한다.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며, 아름다운 그곳은 '믿음'을 통해 건너갈 수 있는 장소 없는 장소에 가깝다. 철학이 로고스의 언어로 그곳을 지향하는 언설이라고 할 때 성서는 '믿음'을 통해 천국을 지향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둘의 형식은 다르지 않다고 레비나스는 말하고 있다.


3.

장 뤽 낭시의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은 레비나스의 무한, 초월, 타자성과 맞닿는다. 낭시의 네 가지는 유한자에게 그도 모르는 몫까지 주는 것이며,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찾을 수 없는 환원 불가한 고유함이다. 갑작스러운 도래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하는 가능성이자, 끝 간 데 없는 환대와 다르지 않다.


포스트모던한 시대, 거대 서사가 사라진 사유는 자칫 상대적으로 흐를 수 있다. 상대주의는 독백에 다름 아니기에 결국 유한성의 틀에 갇히고 만다. 어떤 출구도 없는 불가능만 남을 뿐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정신의 척도로 남는다'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열림이 있다는 것이다. 주체의 공고한 껍질에 균열을 내는 단독적이자 보편적인 것이 '신정의사랑아름다움'에 있다.

오직 그 불가능의 가능성을 믿는 일만이 유한자에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는 진리를 상실한 시대에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지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별빛을 바라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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