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3), 레비나스 강독, 12월 17일
네모 : 선생님의 후기 작품을 성서 신학의 핵심과 철학 전통 및 언어를 조화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레비나스 : 성서 읽기는 제가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방식, 다시 말해 모든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사유 방식을 형성하는 데 본질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서를 통한 근본 경험에서 종교적 심원함을 헤아리는 척도는 어떤 예민한 의식, 곧 성서가 말하는 성스러운 이야기는 그저 일련의 종결된 사건이 아니고 세계 안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운명과 직접적으로 실제적 관계를 맺는다는 의식이었습니다. (중략) 실제로 모든 것은 철학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철학이 존재 의미의 첫 번째 장소, 의미가 시작하는 장소는 아닌 것 같습니다.
1.
레비나스에게 성서 읽기는 '철학적 사유가 철학 이전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주체로부터 발화되는 사유가 아닌 그분에게서 온 말씀은 선험적일 수밖에 없다. 유한성에 속한 존재자로, 절대적 타자로부터 온 로고스의 언어를 경청하는 그의 주체성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타자를 지향하는 존재로서 주체라는 철학적 테제는 그의 중심적 사유이며, 이는 성서 읽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성서 읽기'는 개별성을 묶어주는 보편성의 언어로서 사유다. '모든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사유방식'으로서 성서 읽기는 절대적 타자성을 통해 읽고, 언설할 수밖에 없다. 개별적 주체는 그분을 지향함으로 단독성을 부여받고, 그러한 다른 존재들과 '위로 열림'을 통해 지배 없는 전체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을 지향하는 사유만이 고유하며 동시에 공동체적일 수 있는 아름다운 역설을 그는 성서를 통해 배운 것이다.
2.
레비나스적 읽기는 텍스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필요로 한다. 그가 말하는 성서의 텍스트는 종결된 사건으로서 에크리튀르가 아니다. '세계 안에 유대인과 직접적, 실제적 관계를 맺는 의식'이라는 점에서 무한의 언어를 향해 존재자들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연결되어 있는 복잡한 형태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이 다양체는 결코 닫힌 체계로서 끝나버린 사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무한에 다가가는 에크리튀르를 읽고 발화하는 그라마톨로지를 통해 성서는 항상 새로운 텍스트로 남는다.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관계로 존재자와 연결되는 것이다.
성서 속 이야기는 단절적 구원으로 종결되는 일회적 사건일 수 없다. 유한자가 텍스트를 열고 묵상하며, 읽어가는 행위를 통해 구원의 순간은 차이 있게 반복된다. 무한과의 만남을 통해, 존재는 성장해나가는 과정체로 끊임없이 배운다. 끝날 수 없는 에크리튀르의 아름다움. 그라마톨로지를 통한 그들의 연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위의 공동체는 지금 여기, 각자의 장소에서, 저 먼 별빛을 향해, 있을 수 있다.
3.
모든 것은 철학의 언어, 로고스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언술 된 것은 인식으로 환원된 것이기에 주체 바깥에서 온 진리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레비나스가 '철학이 존재 의미의 첫 번째 장소, 의미가 시작하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맥락에서 쓰인 것이다.
철학의 사유는 유한의 주체에서 출발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바깥에 있기에(지젝)', 진리 주체로서 철학함은 항상 선험적이며 장소 없는 장소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그는 기다리며, 그분이 도래하기를... 또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