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읽기(6), 레비나스 강독, 12월 21일
네모 : 그렇다면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선생님에게 부합한 것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떤 물음과 불안이었습니까?
레비나스 : 어떤 가능한 새로움도 희망할 미래도 없는 세계,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두려움이 분명 그러한 것입니다. 운명 앞에 서 있다는 고대의 두려움, 보편적 메커니즘에 대한, 부조리한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그러한 것인데, 왜냐하면 지나갈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베르그송은 시간이라는 고유하면서도 환원 불가능한 실재를 전면에 부각하였습니다. 가장 현대적인 과학이 '새로운 것이라고는 전혀'없는 세계 안에 우리를 다시금 가두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과학이 최소한 그 고유한 지평의 갱신을 우리에게 확보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로움의 정신, '존재와 다른' 현상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를 가르쳐 준 이는 베르그송입니다.
1.
'현대 과학이 새로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세계에 우리를 가두는 일'은 벌어지고 있다. 생물학 환원주의, 빅데이터로 환원된 존재, 모든 학문에 요구되는 과학주의는 새로운 신의 자리에 과학을 모신다. 부정성의 사유가 매끄러움으로 대체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신은 의심할 여지없는 전체성으로 군림한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언급하듯 과학은 '최소한'의 고유한 지평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하며, '최대한'으로 통치하는 폭군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유전자의 문제로 환원되고, 자본의 효율성을 위해 숫자로 환원되어 버리는 작금의 현실은 비관적이다. 매끄러워지라는 시스템의 요구 아래 존재는 철저히 파괴되고 있다. 모든 부정성을 제거당한 존재는 아무런 저항 없이 중세로 가는 열차에 탑승한다. 오히려 자신의 의지라고 믿는 '할 수 있음'의 폭력에 순응한다. 허위의식과 생존의 위협 앞에, 그는 더욱 체제의 일부가 되기 원할 뿐이다.
2.
중세로 가는 열차는 직선의 시간을 달린다. 바깥이 없는 설국열차를 탄 현대인들은 '어떤 가능한 새로움도, 희망할 미래도 없는 세계'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들의 미감은 매끄럽고, 안온하며, 아펙툼적인 것을 선호하기에 '미리 정해진 것'을 원한다. 낯선 작품이 아닌 익숙한 상품을 원하며, 아케이드에 놓인, 더 좋은 제품을 사기 위한 경쟁에 몰두할 뿐이다. 그들의 미학은 진정한 새로움, 완전히 다른 것의 강도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두렵고 회피해야 할 죽음과 같은 것으로 아예 없는 것처럼 치부될 뿐이다. 이에 존재와 바깥의 사유, 재앙의 아름다움은 작품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적당히 가공되고, 교환되며, 사라진다.
3.
베르그송의 시간은 상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를 복원시킨다. 곡선의 시간을 사는 우발적 존재는 그 앞에 도래한 단 한 번의 사건을 필연적 사건으로 만든다. 그의 내재적 강도는 홀로 계시받은 유일성에 근거하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위해 지속하는 존재를 감당한다. 그는 허위적 아비투스를 넘어서는 '시간과 존재 의식'을 믿는다. 이는 무엇보다 지난하고 오랜 싸움을 감당하는 일이며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존재는 파괴될 것이고, 어떤 가능성도 없는 죽음에 다다를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사랑을 사랑하며, 서늘한 용기를 가지고 어루만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