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3)

「행복한 청소부」 인문적 읽기 / 언어는 존재의 집, 사유의 시작

by 김요섭



사유는 폭력적으로 온다


사유는 폭력적으로 온다는 들뢰즈의 말을 기억하시나요?

청소부의 ‘사유 없는 일상’에 아이의 말은 '폭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관성적인 행동을 멈추고 생각해보게 하지요. 단지 청소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표지판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평소 보던 글자를 재인식하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라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청소부가 글자를 달리 해석한다고 갑자기 다른 존재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멈춰 서서 표지판을 관조하는 일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청소 행위'와 배치되는 행동입니다. 작은 변화지만 노동으로만 만족하던 삶을 멈추었다는 것에 중점을 두면 새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


낯설게 보는 것으로부터 사유는 출발하며 그 과정은 언어를 통해야 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기에 새 언어가 들어오는 일은 완전히 다른 존재를 집에 들이는 일과 같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가정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함께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곤란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분명한 것은 이전과 동일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타인의 등장은 안온한 일상에 색다른 긴장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지요.


새로운 언어가 자신의 사유체계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관념에 균열을 내며 등장합니다. 고정불변이라 믿으며 딱딱해져 버린 생각에 커다란 구멍을 내는 사건이지요. 썩은 냄새가 나며 고여있던 웅덩이에 새롭게 물이 흘러오고 나가는 일처럼 말입니다. 다른 생각의 시작은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는 것입니다.



사유의 시작, 민감성


보통의 청소부라면 아이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남다른 민감성을 보입니다.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되뇌지요. ‘그건 안 되지. 이대로는 안 돼.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치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카프카)'를 도끼를 들고 내리찍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평소 우리는 편견의 덩어리일 수 있습니다. 반복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노동, 차이 없는 소비와 휴식은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엿보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지요.

아름다움을 위한 빈틈을 생성하기 위해 우리는 사유해야 합니다. 평행을 이루는 노선만을 질문 없이 달리는 폭주기관차를 멈춰야 하지요.


잠시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려볼까요?

3등 칸에서 1등 칸으로의 진격한 커티스는 희망을 발견했나요? 오히려 윌포드가 알려준 진실은 절망에 가까웠습니다. 자신이 주동했다고 생각한 혁명은 인구수를 줄이기 위한 협잡임을 알게 되지요. 어린아이가 납치된 것도 부족한 기차 부품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열차 속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궁민수, 요나와 함께 열차를 폭파시키고 외부로 나갑니다. 유일하고 새로운 인류가 된 것이지요. 생명이 없다는 선입견과 달리 북극곰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쨌든 새로운 외부를 상상하려면 멈춰 서서 사유해야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영화에서처럼 열차의 끝까지 가야만 합니다. 내부의 끝을 만지고 한계를 고민할 때, 비로소 외부는 생성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빠르게 흐르는 일상에서 우발적인 변화를 포착하고 청소부처럼 집중할 수 있는 민감성도 필요하지요. 멈출 수 없다고 느끼는 시스템에서 아예 뛰어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지 않고 새로움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저씨는 스스로 되뇐 '이대로는 안 돼'라는 말로 변화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민감하게 자신을 살피려는 주체적 의지가 느껴지나요? 그는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질을 시작한 것입니다. 단일한 파란색 복장으로 살아가던 청소부에게 드디어 개체성이 발화되는 순간이 도래했습니다.


자각의 순간 열린 빈틈으로 아름다움이 창조될 공간이 생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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