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3)

[다른 사람들] 인문적 읽기 / 동일자의 감옥, 성과주체와 피로사회

by 김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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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자의 감옥


알람 소리에 일어난 남자는 이를 닦고, 정장을 입습니다. 무표정한 그의 행동은 사뭇 기계적입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비어있지요. 부모님의 도움으로 준비를 마친 그는 집을 나섭니다. 출근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한 방향으로만 걸어갑니다.


보통의 도시 생활자처럼 그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부모님은 가방과 옷을 챙기며 첫 출근을 돕지요. 가족의 공간을 묘사하는 그림은 구획되어 있습니다. 이를 닦고, 옷을 입는 그의 행동은 기계처럼 경직되어 있지요. 그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동자가 비어 있습니다. 치료감호를 받으며 몸만 작아진 것이 아닌 것이지요. 왜소해진 체격과 함께 상실한 것은 비어버린 눈동자처럼 자신만의 시각일 것입니다.


상실한 꿈처럼 공허한 눈동자를 가진 것은 남자만이 아닙니다.


출근하는 도시인은 눈동자가 없는 동그라미 형태로 눈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트를 말끔히 빼입은 차림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중요한 것이 비어있지요. 남자와 '같은 사람들'이 도시 곳곳에서 걸음을 재촉합니다. 자기를 상실한 이들, 상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 다른 사람과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타자 아닌 타자'는 도시 속에 넘쳐납니다.



낙타의 삶


다름의 부정성을 상실한 인간은 눈동자 없는 눈을 가졌습니다. 자신만의 시각을 상실했기에 규율에 복종하고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습니다. 철저히 낙타의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한 것이지요. '좋아요'만 남은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요? 왜소하고 비슷한 욕망을 가진 이들의 삶 말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짐을 질 수 있는지, 주인의 명령을 얼마나 빨리 수행할 수 있는지와 같은 일 아닐까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기 전의 자신을 기억한다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일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성과 주체와 피로사회


빌딩으로 은유되는 현대의 합리적인 시스템은 도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주인입니다. 그들이 속해있는 시스템은 촘촘한 분업체계로 이루어져 있고 규격화되어 있습니다. 낙타처럼 순응하면 보상이 따르지요. 도시인들에게 삶의 정점은 빌딩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 마천루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고 싶은 것이 그들의 최종 희망사항일 것입니다.


이러한 도시인에게 주인보다 큰 존재가 울타리를 침범한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요? 고층 빌딩보다 커다란 거인의 등장은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을까요? 이미 명령을 내리는 자의 명령 자체도 내면화하여 면역학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성과 주체(한병철)'가 되어버린 현대인에게 말입니다.


' 성과 주체란, 과거에는 어떤 일을 명령하는 대상이 외부에 있었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은 규율과 보상체계를 우리가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누군가 항상 감시한다는 믿음에 기반한 근대 권력 시스템'은 명령 없이도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효과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과 주체는 '피로 사회'에서 소진되고 소비됩니다.'

- 혹시 잘 이해가 안되시면, 2편 '파놉티콘' 설명 부분을 다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어느 순간, 빌딩의 그림자가 아닌 검은 음영이 길게 늘어집니다. 도시로 거인이 침입한 것이지요. 갑작스러운 거인의 등장에 다들 놀라서 도망칩니다. 남자만 도망치지 않고 그를 향해 다가섭니다. 예전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를 거대한 이에게 온 힘을 다해 가방을 던집니다.


그림책으로 돌아가 봅시다. 갑자기 등장한 거인의 모습에 도시인들은 도망치기 바쁩니다. 오직 남자만 홀로 거인에게 향합니다. 자신의 가방을 힘껏 던지며 증오심을 표현하지요. 다른 사람들이 가방을 품에 안고 도망치는데 급급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남자는 왜 도시인들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요? 분명 이들과 같은 눈, 같은 복장을 하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음에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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