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타자의 삶(2)

[이빨 사냥꾼] 인문적 읽기 / 소비의 이면, 부정성 속의 진실

by 김요섭
이빨 사냥꾼.JPG




소비의 이면


할 일이 없을 때 우리의 습관적 행동을 떠올려 봅시다. 생각 없이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잡지 않나요? 알림이 왔는지, 미확인 메시지가 있는지, 새로운 영상은 없는지 검지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입니다. 곧 유튜브 영상을 클릭하거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스크롤하는 여러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중에서 특히 쇼핑을 할 때 생기를 느끼지 않을까 싶은데요. 결제를 하는 순간, 화면의 물건이 내 소유로 확정될 때를 떠올려봅시다. 무기력했던 시간이 감쪽같이 사라지며 생동감을 얻지 않나요?

소비를 통해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끝도 없는 상품은 유혹의 썸네일로 곳곳에 넘쳐흐릅니다. '아우라를 상실한 오브제(발터 벤야민)'의 모습을 한 그것은 스크롤을 다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합니다.

'네가 지불하기만 한다면, 무기력함은 곧 생기로 바뀔 거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한번 돌아봅시다. 무엇인가 구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집중하지 않나요? 관성적으로 살며 딱히 집중할 것도 없는 일상과 달리 소비의 시간만은 무기력을 벗어던집니다. 확정적인 소유가 생긴다는 사실, 무료한 일상을 메이크업해줄 대상은 우리를 흥분하게 합니다.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온통 에너지를 쏟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대한 저렴하게, 합리적인 제품을, 나름의 취향대로 구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비교 검색도 하고, 쿠폰에 카드 할인까지 고민합니다. 노동하는 시간 외의 짧은 휴식을 이렇게 소진한다면, 다른 소중한 것을 생성하기 위한 에너지는 고갈될 수밖에 없겠지요.



욕망의 대가


만약 소비가 본연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더 생각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소비는 깨진 항아리처럼 붓고 또 붓더라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요. 우리의 욕망처럼 소비는 만족을 모릅니다. 일시적 포만감은 곧 허기로 바뀝니다. 만약 깨진 항아리라도 계속 물을 흘려보낼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붉은 쇼핑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인간은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 '노동을 위한 소비, 소비를 위한 노동'이 반복됩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철저히 소외됩니다. 언제든 우리는 은행 계좌에 찍힌 숫자로 환원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어떤 목소리도 낼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소진되었고, 지쳤기 때문이지요.


허무한 순환을 멈추기 위해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노동 너머, 소비 너머를 탐구하기에는 존재 역량이 너무도 부족하지요. 자기만의 온전한 시간, 창조적이며 자족적인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간단한 클릭 몇 번으로 생기를 얻을 수 있는 소비는 분명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요.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소비되고 무의식적으로 흐릅니다.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은 운명이 된다. - 칼 융


하지만 힘들다고 쉬운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아케이드의 찬란한 빛 이면의 부정성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짙어지듯 소비의 욕구가 강하면 소비하지 않을 때의 무력함도 커집니다. 부정성의 시간을 회피하면 관성적으로 사는 나와 분리된, 내 속의 자아는 고통받습니다.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의 이빨이 썩듯 마음속에 달달함만 채우면, 내면에 커다란 생채기가 생깁니다. SNS를 떠돌며 '좋아요'를 누르고 '긍정성'만 쇼핑백에 담으면 분명 우리 속의 아이는 성장하지 못하고 상처 받습니다.

타자 아닌 타자로서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차지하던 존재는 '좋아요'와 함께 사라집니다.

우리가 사유하지 않음으로 코끼리가 사라지듯, 아이가 사라지듯 '나도 사라집니다.'


상아를 뺏기고 잔혹한 죽음을 당하는 코끼리의 고통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멸종을 막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죽음에 책임을 지고 자책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의 힘이 약해서 보지 않으려는 것. 자기 속의 상처 받아 자라지 못한 아이의 고통이 결코 그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생의 이면의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을 고민해야 할 시간입니다.

단 한 번의 삶을 철저히 긍정하기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고통받는 타자의 삶(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