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바깥에 있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존 버거 읽기(7)

by 김요섭



희망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지 않은 것이다. - 루쉰


'우리는 다르게 볼 수 없는 것일까?' 상징계 속, 체제의 아비투스를 부착한 신체로는 불가능 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부조리로 가득 찬 실존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아름다운 순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죽음이 거의 도착한 순간에도 '오늘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의지는? 다르게 보기는 결코 쉽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다른 순간이 없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이를 지시하는 언어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지젝의 문장에서 중요한 단서를 어보자.


'진리는 바깥에 있다' - 슬라보예 지젝


바깥에서 누군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체성 안에 갇힌다. 거주하고 정주하면서 만들어낸 자기 회귀적 동일성은 전체성의 속성이다. 거기에는 나르시시즘과 같은 폐쇄적 자기애를 찾을 수밖에 없다. 다름이 아닌 자기 동일성이 존재할 뿐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위해서는 자기 동일성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바깥을 향한다는 것이다. 체제의 아비투스에 찌들어버린 신체의 바깥, 그곳에 낯선 진실이 있다. 그 실재계의 거울 앞에서 우리는 본래적 실존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으며, 타자도 타자인 채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신정의사랑아름다움


그렇다면 지젝이 말하는 진리, 바깥이라는 장소의 성격을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타자적인 것' 즉 나에게로부터 연유하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주체가 소유할 수 없는, 잠시 소유했다 하더라도 계속 멀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타자는 소유됨 없이 존재하며, 그것은 바깥 어딘가 장소 없는 장소성을 가진다. 신성, 정의, 사랑, 아름다움과 같이 잠시 주체 안에 머무르다가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동시에, 항상 가까이 있으며, 언제나 멀리서 도래하는 손님이기도 하다.



카메라의 등장과 바깥


존 버거의 책 속에서 사례를 찾아본다면, 카메라의 발명을 들 수 있다. 이전까지 회화의 원근법이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주체성의 인식자 현재라는 시간성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체성은 자기 동일성의 관성을 가지기에 거기에는 새로움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의 등장은 '사물의 순간적인 모습을 분리시킴으로 모든 이미지에는 시간이 없다는 관념을 깨뜨려 버렸다. 회화가 주체의 인식론적 환원으로부터 벗어난 사건인 것이다. 이는 이전의 관성과 고정관념을 넘어선 새로움이며, 낯선 진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젝이 말하는 바깥의 가능성의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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