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계의 다름, 실재계의 다름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존 버거 읽기(6)

by 김요섭



관성적 보기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은 어떤 일일까? 아니 정말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상품의 세부적 차이, 일상의 적당한 차이를 다름으로 눙치며,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평소의 관성대로 안온하게 생각한다면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다른 방식으로 보는 일,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세상에 없던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은 그러한 타협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장 뤽 낭시가 이야기하듯 '그도 모르는 몫까지 주는 일이며', 단 한 번도 도래한 적 없는 타자를 환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징계와 실재계의 다름


상징계에 있는 우리는 현체제의 질서에 젖어 있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내 것일 수 없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시스템의 욕망을 내 것 인양 생각하며 살아갈 뿐이다. 또한 우리가 모방하는 타인 역시 상징계 속의 일부이기에, 우리는 진짜 본래적 실존으로 자신의 모습이나 타자를 볼 수 없다.


우리의 일상성 역시 진정한 새로움을 환대할 수 없게 한다. 성과 주체로서 현대인은 자본적 교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한 유한성의 끝단에서 우리는 카프카를 만난다. 그의 소설, '변신'에서 유용성을 상실한 그레고르의 흉측한 모습은 우리의 실존이기도 하다. 가장 사랑받아야 할 가족에게 버려지는 것은 잔인한 일이나, 단지 소설일 뿐이라 치부할 수 없는 서늘한 진실인 것이다.


여기서 잠시 멈춰서 첫 번째 질문을 다시 바꾸어보자.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자본적 교환 수단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계산이 들어오지 않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고 번역할 수 있다. 안타깝지만 이 질문에 머뭇거린다면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없음을 고백한 것과 다르지 않다.



성과 주체의 아비투스


일상성과 나를 분리할 수 없고, 존재의 집인 우리의 언어가 고착되어 있기에 다른 접근은 불가능하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만나는 차가움은, 현체제의 성과 주체에게 노골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푸코가 말하듯 그것은 근대 이전에는 채찍과 억압으로 작동한 반면, 현대는 체제의 아비투스에 스스로 복종하는 '할 수 있음'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진정 사랑의 관계가 아닌 한, 타자는 대상으로 전락하며 동시에 주체는 자신의 물화를 경험할 뿐이다. 이러한 상징계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으며, 안타깝지만 닫힌 세계 내의 우리는 진정 다르게 볼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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