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당신을 구원할 때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존 버거 읽기(5)

by 김요섭


카메라의 발명은 사람들의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가시적인 것은 이제는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점은 즉시 회화에 반영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제시돼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끊임없이 유동 속에서 도망쳐 사라지는 것이었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더 이상 단일한 눈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묘사하는 사물 또는 인물 주위의 여러 다른 각도에서 본 광경들을 한데 모은 전체를 가리켰다. p23



중심 없는 중심, 노마드


가시적인 것의 중심이 사라지는 것은 노마드적 시간과 장소성으로 향한다. 주체성에 의해 환원될 수 없는 타자성은 '끊임없는 유동 속에 도망쳐 사라지는 것'과 관계할 뿐이다.


인상파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과의 관계를 특정 장소의 연작을 통해 포착하였으며, 입체파의 경우에는 주체의 시선이 닿지 않는 타자성을 하나의 평면에 나타내고자 하였다. 두 화풍 모두 유동하는 시간과 닿지 않는 시선, 즉 중심 없는 중심을 두었다는 것에서 완전히 새로울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


'가시적인' 것이 볼 수 없는 것과 관계한다는 인식은 주체성을 구원한다. 볼 수 없는 것, 비존재, 비의식은 없으나 없지 않다. 그것은 비인칭적인 일리아(il y a)로 도처에 있기도 한 것이다. 다만 성과주체에게 절대적 타자성은 '죽음'과 같은 부정성이기에 없는 것으로 치부될 뿐이다.


그러나 주체성의 균열로서 시작된 그의 무화됨이, 의식이 아닌 심연을 들여다볼 때, 그는 비로소 텅 빈 주체성으로 거듭난다. 관성이 아닌 판단 중지의 순간을 만나며, 그는 자기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정주성에 집착할 때 결코 새로울 수 없었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자기를 포기함으로 자기를 획득한다.


그러나 새로운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텅 빈 주체성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타자는 그도 알지 못한 채 함께 있다. 그가 붙잡을수록 멀어지며, 끊임없이 유동하는 타자성은 그의 인식으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러나 그분과 함께 하기에 그는 재앙 속에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며, 폭력적으로 오는 사유 뒤에 완전히 새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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