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성에 머무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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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요섭


원근법의 관습은 모든 것이 관찰자의 눈에 집중된 것으로,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되었다. 원근법은 두 눈이 아닌 하나의 눈을 가시적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다. 무한대의 소실점으로 모이듯이 모든 것이 그 눈으로 집중된다... 원근법의 관습에 따르면 시각적 상호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내적인 모순은 단지 한 장소,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 p21



동일자의 현재, 원근법


원근법이 망실한 '두 눈'은 복수적 단수성이다. 외눈박이의 전체성은 타자성을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의식에서 멀어진 무의식, 존재와 분리된 비존재, 비인칭적 있음의 일리아(il y a)는 '하나의 눈'으로 다가갈 수 없다. 다른 하나의 눈을 가진다는 것은 낯선 시간과 헤테로토피아적 장소에 머무르는 일이다. 그것은 고착된 정주성 너머, 바깥을 향한 몸부림의 흔적이며, 부정성을 온전히 감내하는 일이기도 하다.


카메라의 발명(22~23p)은 원근법에 해체를 가져온 사건이다. 하나로 수렴되는 시간성을 깨뜨리고 카오스의 이미지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는 세계를 신적인 눈으로 파악해왔던 주체성에게 '거기 있음'의 장소성을 부여한 사건이기도 했다. 세계-내-존재로서 주체성은 부동의 동자일 수 없음에도, 자신을 돛에 결박시킨 채 타자성을 만끽하는 오디세우스처럼 군림해왔던 것이다.



부정성에 머무르기


타자의 도래는 주체의 관성적 현재에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일이다. 이는 획일적 시간성이자 직선성에 곡선의 시간성을 기입하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에게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향유해왔던 무지와 폭력을 넘어서는 일이며, 절대적 타자성과 함께 머무르는 일이다.


그러나 '내적 모순'이자 부정성은 동일자가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멀리서 온 손님의 낯섦과 전적인 다름은 그의 전체성을 균열시킨다. 거주하고 정주하면서 단단해져 버린 것을 깨뜨리고 타자를 환대할 때 그는 비로소 곡선의 시간성을 살아낼 수 있다. 이는 그분을 오직 그분인 채로 받드는 일이며, 완전히 다른 심연의 눈을 가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가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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