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성의 언어, 신비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존 버거 읽기(3)

by 김요섭


신비화는 어떤 어휘들을 사용했느냐 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조금만 달리 보면 너무나 명백한 것을 쓸데없는 엉뚱한 설명으로 핵심을 흐려 놓는 데서 신비화는 비롯된다. 20p



주체성과 초월


작가의 의도는 다 계획되지 않는다. 엉뚱함, 쓸데없음, 흐려놓기는 작품에 타자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기원과 같다. 이는 주체성의 언어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는 일이며, 바깥에서 진리가 도착하기를 소원하는 일이다.


주체의 무방비이자 온유, 균열이자 열림의 장소 없는 장소, 비로소 도착한 비존재. 작가는 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 동일자의 전체성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신비 앞에 겸허히 머리를 숙인다. 드디어 그는 '복수적 단수(장 뤽 낭시)'로서 전혀 다른 것을 쓸 수 있는 신체가 된다. 자신도 몰랐던 붓터치, 완전히 새로운 언어의 생성. 그것은 타자성의 초월이며,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영원 같은 생성의 순간인 것이다. 이로써 작품은 단독성을 얻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다.



지배하는 전체성의 언어


여기서도 존 버거의 문장을 걸고넘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문체는 첫 문장부터 걸리더니 책을 읽어가는 것이 여간 상그러운 일이 아니다. 억지로라도 읽어나가야 할 이유가 있지 않다면, 진작에 멈췄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사유에서 가장 걸리는 것은 글쓰기 방식에 녹아있는 '지배하는 전체성'이다. 앞서 인용에서도 드러나듯 '신비화'를 '사용한다'든지, '핵심을 흐려 놓으면 신비화는 달성된다'는 식의 문장 쓰기는 그가 타자성을 어떻게 사유하고 대상화하고 있는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언어가 마뜩잖다. 그래서인지 읽기는 계속 허공을 맴돌고, 문장은 가슴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무한이 아닌 전체성이 묻어있는 그의 글쓰기 방식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신비는 주체성이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 느닷없이 도래하는 것이지, 자신의 의지나 주술적 요청으로 오고 가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타자성을 주체성 앞에 내걸지 않는 이상 결코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도 모르는 바는 아니겠으나. 곳곳에서 그의 문체가 걸리적거리며, 읽기가 여간 상그러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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