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위험의 단계, 특이한 부동성

「최후의 인간」 모리스 블랑쇼 읽기(17)

by 김요섭



그녀는 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바나 같은 곳에서 말뚝에 묶여 있는 꿈을 꾸었어요. 제가 앉은 밑에 잔디가 얕게 깔렸고, 제 쪽으로 기울어진 구덩이가 있었는데, 저는 작은 틈을 통해 아마도 넓은 곳을 보았던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그건 덫이잖아요. 짐승을 잡기 위한 구덩이."ㅡ"그 구덩이를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니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꼼짝 않은 채로. 아니, 그건 일종의 특이한 부동성 혹은 침묵 같은 것이었는데 바로 당신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어요."


내가 물었다. "당신이 그 덫에 걸렸다고요? 당신은 거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ㅡ"저는 만족스러우면서도 불안했어요.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불렀는데, 왜냐하면 소음을 내면 분명 위험해질 것이기 때문이었죠.


거기서 멀지 않은 곳, 바로 제 뒤에서, 무언가의 움직임을 감지했는데 제가 묶여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뒤돌아볼 수 없는 무력감은 불안한 만큼 화를 돋웠어요. 어쨌든 미칠 듯한 불안감이 엄습했어요." 분노와 두려움. 하지만 내게 꿈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오히려 꿈을 꾸었다는 사실에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거의 꿈을 꾸어 본 적이 없었고 단지 장면도 이야기도 없어 텅 비어 있는 몇몇의 이미지가 전부였다. "어쩌면 전 지금 꿈꾸는 법을 배웠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해서 그녀는 비로소 무르익은 위험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39~40p)




1.

'뒤돌아 볼 수도 없는 무력감'은 죽어감의 현상이다. 덫에 걸린 신체는 손발이 묶인 채, 창살 뒤로 내팽개쳐진다. 존재자라는 감옥에 갇힌 존재. '미칠듯한 불안감'은 끔찍한 고통을 마주한다. 가장 가까이서 일어나는, 가장 먼 감각. '기울어진 구덩이'의 빈 틈으로 스며드는, 절대적 타자와의 관계. 존재자가 존재와 분리되는 사건이다.


2.

황혼의 느슨함, 시작되는 어둠에 내맡겨진 존재. 텅 비어버린 이미지는 '만족스러운 불안'이다. 죽어감은 망각의 축복이기에. 자신의 감옥마저 잊어버린다. '분노와 두려움'은 '꿈꿀 권리'로 변용된다.


우리를 떠올리는 '꼼짝 않음'은 '특이한 부동성'이기도 하다. '무르익은 위험의 단계'는 새로운 고통을 요청하는 대담함 일지도 모른다. 죽음마저 지연시키는 단 한 번의 결단. '어쩌면 전 지금 꿈꾸는 법을 배웠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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