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험하고 느린 기다림, 반항하는 인간

「최후의 인간」 모리스 블랑쇼 읽기(45)

by 김요섭



1.

'차가운 현존', 눈 속에 파묻힌 다리는 검붉게 변했다.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풍경'. 그녀를 어루만지는 애무는 계속해서 주변을 맴돈다. '오래전에 죽었을지도' 모를 서늘한 육체는 '소멸되지 않는 고통의 두께'를 가졌다. 나를 '배반'한 '가장 은밀한 생각'. 우리는 다시 한번, '한 점으로 화할 하늘'일 수 있을까? 나는 '출구조차 찾지 못할 고통의 공간'을 계속해서 헤맨다. '전혀 다른 것'을 찾으며, 방황하는 기이한 환각. '그녀를 동요시켰던 혼미함'에 '전염'된 것 같은, 어떤 '필연'.


2.

'음험하고 느린 기다림'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나도 모르는 무엇을 향함이다. '방종한 현실' 가운데 가혹한 높낮이 속으로 몰락하는, 반항하는 인간. '으스러뜨리고 싶은 욕구'는 더 깊은 심연에서 건져 올린 '불투명'한 욕망이다. '다가왔다가, 아주 멀리 올라가 버리는' 무정한 발자국 소리. 비명 섞인 '내가 원했다'는 끔찍한 이별 앞에 또다시 부정당한다. '역겨운 혐오', 멈추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로 갈 '최후의 인간'.




그녀의 대답에는 지극히 합당한 근심밖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쩌면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에 남들이 겪을 수 없는 고통의 현실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그 대답에서 자신이 품고 있던 가장 은밀한 생각들 중 하나를 배반했는지도 모른다. 그녀 주위에선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거쳐 갔는데, 죽기 위해, 소멸되지 않는 고통의 두께를 뚫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면, 너무도 어두워 출구조차 찾지 못할 고통의 공간 속에서 방황하는 두려움을 겪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똑같이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나는 그녀의 말에 진정한 관심을 쏟지 않았다.


아니, 그녀를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당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만큼이나 그녀를 다시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소름 끼치는 차가운 현존 속에서, 눈 속의 고요한 풍경 속에서, 한 점으로 화할 하늘 아래서 내가 그녀의 다리와 벗은 엉덩이를 밀착해서 둘러싸고 그녀를 조금씩 조금씩 끌어당겼는데, 결국엔 그녀를 동요시켰던 혼미함 속에 빠져들듯 그녀는 내 곁으로 쓰러졌다.


우리는 아직 도서관에 있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에 가는 것은 그에게로 올라가는 것이고, 그의 멈칫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복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틀림없는 그의 기척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자국 소리는 다가왔다가, 아주 멀리 올라가 버린다. 그는 마치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이내 복도를 지나가 버린다. 그가 돌아올 것이란 생각은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어느 날엔가 그에게로 갈 사람 역시 나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혼자서? 그렇다. 아마 나는 혼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 순간으로부터 어떤 결과를 내놓을까?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스스로 고통을 덜기 위해, 이러한 종류의 고통에 얼굴을 부여해 주기 위해, 그의 침묵으로부터 그녀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녀에게 억지로 말하게 만들고 그에게까지 이르기를 시험해 보는 것. 그것은 내가 전염될 비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왜 가서 그를 혼란스럽게 할까? 내가 접근해서 그에게 나를 알아야 하는 의무를 왜 부과하는 것이며, 그가 침묵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견디고 있던 가혹한 고통을 왜 자각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필연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뿐 아니라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에 저항하고자 하는 반항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최후의 인간 때문에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다. 그의 주변에는 혼란스러운 영역이,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방종한 현실이 있었다. 그의 주위에 혹은 어쩌면 그 안에. 그것은 낮은 것이었으며, 그 역겨운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자 이러한 호명에 응답하는 유일한 운동은 어떤 혐오의 운동이고, 그것은 그를 낮추고, 으스러뜨리고 싶은 욕구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손대고자 하는 욕구인데, 직접적인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소멸에 상응하는 음험하고 느린 기다림에 의한 것이었다.

(82~83p)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죽음보다 강할 수 있다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