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한병철 읽기(4), 행복 강요, 9월 15일 단상

by 김요섭


고통의 심연


고통과 만나지 못할 때 나는 외화 된다. 깊은 심연에서 도사리는 뱀의 아가리로 손을 넣을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이 된다. 상처는 나를 삼키고 내뱉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성적으로 지낼 때 감각할 수 없는 파토스는 일상의 한가로움을 교란하고 덮친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나는 궁색한 변명을 한다.


어느새 뱀은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았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 낯설지 않다.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갔을 때 나는 전율한다. 암매장 후 파헤쳐진 얼굴은 일그러진 채 무의식 저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고통을 거침없이 말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실의 조건이다. 고통이란 주체를 짓누르는 객체성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신의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매개되어 있다.' -아도르노



파르헤지아의 언어


무의식의 소름은 잊힐 수 없다. 굵은 비가 쏟아지던 날, 기억의 계곡 어딘가의 사건이 떠오른다. 살려달라는 외침은 둔탁한 삽질 소리에 묻힌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던 것이 빗물이 아닌 눈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얼굴을 보면서 그를 묻을 수는 없기에 나는 프로세스화 된 기계처럼 무감해진다. 그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가장 주관적인 경험은 사후적으로 언어가 된다. 주체의 억압이 느슨해질 때 기억은 새싹처럼 땅을 뚫고 머리를 쳐든다. 심연의 주관성이 객관의 매개를 통과하면 유일무이한 것이 생성된다. 나를 기억하라는 거침없는 요구는 언어의 옷을 입는다. 그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의 함성이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통렬한 비판이며, 네가 죽인 이의 얼굴을 보라는 내부고발이다.



함께 느끼는 고통


성과사회의 고통은 매끄럽게 지워진다. 성과주체는 통증을 감당할 수 없기에 아픔은 매개자를 필요로 한다. 의사와 약사에게 대리된 고통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그러나 의학적 절차로 무마될 수 없는 여분이 있음을 존재의 허기가 밀려올 때 알게 된다. 지워질 수 없는 존재의 외침은 소송이 대리할 수 없는 것이다.


'행복 장치 안에서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되고, 고통 또한 개인적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한병철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발설해야 한다. 내부고발자가 누설하는 이야기는 '오퍼레이션과 프로세스'의 무감각을 폭로할 수 있다.

매개 없는 비판의 언어가 긍정성의 폭력을 이긴다. 면역되지 않는 인식, 마취되지 않는 성찰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나의 우울은 이제 우리의 허기가 되어야 한다. 고통을 서로 어루만지며 이야기할 때 피로사회는 치유된다. 나의 피로가 아닌, 우리의 피로가 혁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타자는, 지옥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