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겠다는 결단

한병철 읽기(5), 법과 폭력, 9월 16일 단상

by 김요섭


뒤통수가 없는 얼굴


분리된 존재는 결합을 욕망한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찌꺼기가 남지 않는, 완전한 일체감을 경험한 그는 돌아갈 곳을 잃었다. 불행과 행운은 동시에 그를 방문한다. 뒤통수가 없는 양면의 얼굴은 그를 무감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초조하게 몸을 들썩인다. 무언가 근원적으로 변했고, 그것이 결코 행운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는 폭력을 원한다. 잃어버린 순간으로, 자신을 다시 달아매 줄 힘을 찾는다. 일상적 강도를 넘어서는 강력한 것이 필요하다. 그는 주머니 깊은 곳에서 심지를 꺼내 두 손으로 받쳐 든다. 머리 위로 쳐든 모습이 경건하다. 불꽃이 타오르기를, 그는 소망한다. 화상을 입어도 괜찮으니 제발 다시 한번. 그는 위를 올려본다. 무한한 하늘이 어느 순간 그를 누르듯 추락해온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허공을 향해 팔을 젓는다. 불이 붙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다.



공통체


성과사회는 가족주의 없는 가족을 모른다. 자본은 달콤한 언어로 그에게 속삭인다. '가족 같은'으로 시작하는 식상한 언설은 지배의 욕구를 숨기며 말을 건다. 진짜 가족에게 필요 없는 수사는 그것의 유아적 의지의 연장일 뿐이다. 낡은 체제의 언어로는 가족주의를 넘어선 가족은 탄생하지 않는다. 공통감은 자유로운 결정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권력은 공동체를 전제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아의 현상이다. 즉, 자기중심적이다. 함께는 권력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한병철


전체주의는 먼 기억이 아니다. 자유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평범함은 오래된 악을 소환한다. 누구도 지키지 않는 땅에 대나무 뿌리처럼 그것은 돋아난다. 성급한 이웃사랑은 자유로운 결정처럼 보이지만 실존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으려는 도피다. 지배의 형식을 감추는 위선이 아닌 '함께'라는 결단이 진정 새롭다. 나르시시즘으로의 퇴행이 아닌 타자를 지향하는 언설 만이 전혀 다른 것을 낳는다. 오직 고통을 감수하는 의지로 생성된 자유는 환대의 정치로 나아갈 수 있다. 징벌의 위협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감당하는 아픔이 존재를 빚는다.


'정치적인 것은 지배 권력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함께 살겠다는 결단이다. 인간의 삶은 목숨을 좌우하는 무조건적 권력에 내맡겨짐으로써 정치화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겠다는 결정이 인간 존재를 정치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비상상태


성과주체는 열리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비용은 감당하지 못한다. 무한의 빛과 마주치는 우발적 사건은 제거되어야 할 위험일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극단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갇힌 이의 두 눈은 화려한 스크린으로 채워진다. 존재의 허기는 완벽한 가상의 스펙터클이 채운다. 거품처럼 금방 사라질 포만감은 쉴틈 없이 밀려드는 이미지의 파도로 대체된다. 성과주체의 시선은 사유하지 않는다. 평범한 악의 이미지는 자유를 압살 한다. 한계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적당함은 아름다움을 살해한다.


'정상상태를 영속화하는 일이 되어버린 정치는 어떤 초월적 지평도 상실한다. 비상상태가 불가능하다는 것, 정치의 공허는 미디어가 연출하는 스펙터클로 채워진다.' -한병철


비상상태의 폭력이 그를 구원한다. 체제의 끝까지 가보는 일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일이다. 존재의 가장 높은 성채에 도래한 무한이 그를 꺼낼 수 있다. 바깥의 공허가 내면의 빈 것을 지배하지 않고 채운다. 비집고 들어온 상처 사이로 두 팔이 자라난다. 고사리 같이 연약한 손에 들린 촛불에 비로소 불이 켜진다.

순간 그는 지금 여기에 확실히 있다. 동시에 세상의 저편, 공허 속을 유영한다. 날갯짓하는 얼굴에 기쁨의 눈물이 맺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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