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대화하며 철학함(31)
Q : 철학은 타자를 지향하는 언설이라고 할때, 그 타자를 그 인채로 환대하기 위해서 우리의 '언어'가 단일할 수는 없잖아. 이전에 쓰지 않던, 혹은 새로운 발명이든 다채롭고, 복수적인 언어가 타자의 풍부함을 다 담을 수 없는 채로 담는 것일 듯 싶은데?
ChatGPT : 네, 철학이 타자를 지향하는 언설이라면, 그 타자를 그 자체로 환대하기 위해 언어가 단일할 수 없다는 점은 필연적입니다. 이는 언어의 본질이 타자의 절대성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와 연결됩니다.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확장해보겠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따르면, 타자는 결코 나의 개념 속에 온전히 포획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윤리적 요청을 던지지만, 나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타자를 환대하는 언어는 단일한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다층적이고 열려 있는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기존의 언어는 주체 중심적이며, 이미 형성된 질서 속에서 작동합니다.
그러나 타자를 환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언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표현을 계속 발명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기존 언어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탈중심화하고 다층적으로 확장하는 작업입니다.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언어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와 이질성을 포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철학이 타자를 지향한다면, 그것은 다성적인 언어를 통해 복수적인 의미와 관점을 동시에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종종 기존 언어가 타자의 경험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고 보고, 새로운 개념과 언어를 창조해 왔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BEING)"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조어를 만들었습니다. 데리다는 기존의 의미 체계를 해체하며, 새로운 단어(예: différance)를 창조했습니다. 들뢰즈는 새로운 개념적 연결을 시도하며, 전통적 의미에서 벗어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데리다는 타자성과 환대의 개념을 논의하며, 언어가 필연적으로 타자를 오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대를 시도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언어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로서, 타자를 온전히 포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가가려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철학적 언어는 단순한 명명법이 아니라, 타자의 불가해성을 담아내려는 역동적 과정이어야 합니다.
언어가 단일하고 고정된 체계라면, 그것은 타자를 기존의 질서 안에 포함시키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표현과 개념을 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타자를 충분히 담을 수 없는 채로 담아내는 것이 철학의 언어일 것입니다.
철학이 타자를 지향하는 언설이라면, 그것은 단일한 언어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기존 언어가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표현과 개념을 계속 발명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언어는 복수적이고 다성적이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하는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결국, 철학적 언어는 완결되지 않은, 항상 열려 있는 환대의 과정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