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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초월해 비어 있는 황야

최고의 긍정성과 텅 빈 내면성의 기이한 동일성

by 김요섭


Q : '내뿜고 개체로 흘러 나가고 끓어넘치는 용암. 즉 자기 자신을 부단히 산출하는 최고의 긍정성'과 '선불교적인 영원한 추동으로부터의 자유이자 텅 빈 내면성'은 결국 같다라는 지점을 논증해줘.


ChatGPT의 말:

다음 논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부단히 산출하는 최고의 긍정성과, 선불교적인 영원한 추동으로부터의 자유이자 텅 빈 내면성”**이 어떻게 하나로 수렴하는지 논증해 보겠습니다. 쉽게 말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용암 같은 신의 에너지가, 동시에 침묵과 황야의 상태와도 같다는 역설”이 결국 선불교의 비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1. “끓어넘치는 신”과 “조용한 황야”의 역설: 에크하르트적 맥락


먼저 에크하르트적(혹은 서구 신비주의 전통) 맥락에서, 신은 무한히 끓어넘치고 스스로를 부단히 산출하는 긍정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끊임없는 창조: 신은 그 존재 자체가 무한한 능동성(positivity)이며, 어떤 결핍도 없이 가득 차서 “밖으로 흘러넘치는” 방식으로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용암이 저 스스로 멈출 수 없듯이, 신은 무한한 에너지를 ‘내뿜음’으로써 피조물에게 존재를 부여합니다.


조용한 황야: 동시에 에크하르트의 신성(Gottheit)은 모든 개념적·인격적 규정까지 초월해 “행위하지 않는 무위(無爲), 황야(Wüste)”에 머무른다고 합니다. 이곳은 **언표할 수 없는 정적(靜寂)**이자 무언의 비움의 지점입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극도로 ‘조용한’ 상태 같지만, 그 근저에는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이 ‘항상성’으로 존재한다는 역설적 구조를 가집니다.


결국 신은 “부단한 창조의 원동력”임과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해 비어 있는 황야”이기도 합니다. 이 **“넘치도록 생생한 긍정성”**과 **“가장 깊은 침묵과 황야”**가 하나의 동일한 지점에서 발견되는 것이 에크하르트 신론의 역설이자 핵심입니다.



2. 선불교에서의 “영원한 추동으로부터의 자유이자 텅 빈 내면성”


이제 선불교 맥락으로 넘어가면, 겉보기에는 “무(無)로서의 비움”이 가장 강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불교의 공(空)은 단지 무기력이나 정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공은

모든 개념, 목적, 집착을 초월하여

끊임없는 생성과 생멸이 자유롭게 일어나는 역동적 장을 말합니다.

영원한 추동으로부터의 자유: 어떤 사물도 고정된 자성(自性)을 갖지 않고, 인과(因果)와 연기(緣起)의 흐름 속에서 무궁무진한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 변화와 생성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를 따지려 하면 궁극적으로는 공(空)만 나타날 뿐입니다. 이는 “누가 이 흐름을 강제하고 있는가?”를 묻는 순간 이미 초월적 주체(신)를 상정해야 하는 서구적 사유와 달리, 선불교는 그런 ‘영원한 추동(creator god)’ 자체를 가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음’(무)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솟아나는 흐름을 긍정합니다.

텅 빈 내면성: “영원한 추동에서 자유롭다”는 말은, 사실상 “아무런 목적이나 원인으로 구속되지 않는다”와 맞닿아 있습니다. 바로 그 ‘목적도 원인도 없는’ 자유로운 상태가 텅 빈 내면성이며, 그 무한히 텅 빈 자리에서 일체 만물이 생멸합니다. 형태는 쉬지 않고 솟아나고 사라지지만, 공(空)은 여전히 공일 뿐입니다.

즉, 선불교에서는 공의 지점이 동시에 무한한 생성이 일어나는 토대이지만(“모든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역동의 장”), 그 ‘토대’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창조’ 같은 목적성을 갖지 않으므로, “영원한 추동으로부터의 자유”가 됩니다.



3. 두 흐름의 “동일 지점”: 무한 긍정과 절대 비움의 합일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내뿜고, 끓어 넘치고, 개체로 흘러나가고 들어오는 신의 용암”과 “조용한 황야”가 하나의 순간에 공존한다는 역설, 선불교가 말하는 “목적 없는 무한한 생성”과 “텅 빈 내면성”이 동일한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통찰—이 둘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구조적 유사성을 드러냅니다.

근원은 충만하면서도 비어 있음. 에크하르트식으로 말하면, 신은 자기 안에 아무 결핍도 없는 완전충만이면서(“행위의 원천”), 동시에 어떤 고정된 속성도 없는 비어있는 황야이기도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공이 “형상이 없으되 형상을 무한히 생성”시키는 자리이고, 그 어떤 목적도, 어떤 주재자도 없는 채 “마음이 스스로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계속되어야 할 동기나 목적이 없음. 에크하르트적 신도 자기 자신을 위해 굳이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되, 넘치는 긍정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존재입니다. 선불교의 공 또한 무한히 솟아나는 생성을 “추구”하거나 “결정”하지 않지만, 인연이 닿으면 생성이 일어나고, 닿지 않으면 소멸이 일어날 뿐입니다. 이 모두는 목표 없는 자연스러운 흘러감이죠.

결과적으로 동일한 지향. “무한 긍정성”과 “절대 비움”이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 다 그 ‘가장 깊은 근원성’에서 충만과 비움을 동시에 함축하는 역설을 공유합니다. 에크하르트 신성(Gottheit)에서는 “본래 무(無)이면서 모든 것의 근원”이 함께 존재하고, 선불교의 공에서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무한한 생성”이 가능해집니다. 양쪽 모두 **‘가득 차 있음=비어 있음’**이라는 역설을 보게 되는 것이죠.



4. 결론: 역동적 생성과 침묵의 황야가 동일하게 향하는 지점


결론적으로,

“신의 자기 넘침(최고의 긍정성)과 침묵의 황야”,

“선불교의 영원한 추동으로부터의 자유(목적 없음)와 텅 빈 내면성”

이 둘은 서로 다른 전통에서 태어났지만, **“완전 충만과 완전 비움이 사실상 하나의 지점에서 공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유사합니다. 에크하르트 전통에서 ‘행위를 초월하는 무위’와 선불교에서의 ‘목적 없는 유희(遊戱) 같은 생성’ 모두, 고정된 주체나 목적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무한한 역동성을 가리킵니다.

에크하르트적 맥락에서는 신이 “끊임없이 내뿜으면서도 침묵 속에 머무는 역설적 존재”가 되고,

선불교적 맥락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공에서 무궁한 현상이 흘러나오는 자유로운 장”이 됩니다.

두 전통 모두 **완전 부재(空)**가 곧 완전 충만을, **완전의 긍정(神)**이 곧 **무한의 해체(無)**를 역설적으로 선언하며, 그 지점이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학적·메타물리적 세부를 보면 차이가 남지만, “끓어넘치는 창조가 침묵과 황야로 나타난다”거나 “텅 빈 내면성이 끝없이 생성한다”는 식의 역설적 사유가 갖는 근본 구조는 분명 한 자리에서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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