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처럼 익어가는 시간

옹동 두거리

by 정미옥

올 추석은 유난히 길었다. 황금연휴라 동생이 있는 호주에도 갔다 오고 싶었고 딸하고 여행도 다녀오고 싶었다. 하지만 긴 연휴 기간에 소소하고 잔잔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가족과의 시간을 되새겨 보고 싶었다. 이번 명절은 길지만 하루하루가 소중했었다.

몇 해 전부터 송편을 안 빚는다. 송편 빚고 찌고 하는 과정이 고단해서다. 앉았다가 일어났다를 반복하고 커다란 솥, 그릇들을 설거지하는 과정들이 수고스럽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자기만의 모양으로 빚은 시간은 이제 희미해져 갔다. 가족들이 만나 그간의 회포를 풀면서 만들었던 송편은 힘든 노동으로 여겨지니 자연히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 혼자 하기에는 고단하다. 하지만 각지각색의 송편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들이 그립다.


추석 전날 (10월 5일)

추석 전날, 중앙시장에 가서 전 부칠 재료를 샀다. 명태포와 새우를 사고 고구마를 살려고 했는데 남편이 시골집에서 캐면 된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고구마를 캐야 한다고 했지만 아들들은 추석날 고구마를 캐고 정읍으로 탁구 치러 가자고 했다. 남편과 어머니, 셋째 시동생, 딸은 정읍에 탁구 치러 가고 나 혼자 집에 남았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혼자 조용히 시골의 한적함을 만끽하고 싶었다. 고구마 전을 부칠 고구마를 캐러 밭에 나갔다. 고구마를 심어놓은 고랑 한쪽 끝을 팠다. 밭 끝부분이라 고구마가 들지 않았다. 기다란 고구마순을 한 아름 제거한 후 땅을 파니 커다란 고구마가 땅속에 파 묻혀있었다. 고구마가 상처 날까 오른손에 호미를 가지고 살살 팠다. 왼손이 거들어 주었다. 살살 파도 고구마 끝이 안보였다. 어디까지 땅속에 박혀있는지 힘을 주다가는 뚝 끊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이고랑 저고랑을 파가면서 고구마를 몇 개 캐냈다. 나머지는 가족들을 위해 남겨놓았다.


그렇게 캐낸 고구마를 바로 부쳤지만 예상과 달리 퍽퍽했다. 고구마는 캐서 말려야 맛이 든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무르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다림 없이 꺼낸 것은 대게 제 맛을 내지 못한다.


추석(10월 6일)

추석 당일 아침, 가족들은 아버님 성묘에 갔었다. 출발하기 전에 셋째 시동생이 갑자기 집안 마당에서 가족사진을 찍자고 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진 찍자고 했지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처음으로 가족들을 사진 속에 담았다. 비로소 우리 가족도 다른 집들처럼 가족사진을 갖게 되었다. 성묘 갔다 온 후 어머니가 앞장서서 아들들과 고구마를 캐러 갔다. 딸은 아침부터 커피가 필요하다고 했다. 칠보면 고현카페에서 가족들이 원하는 음료를 사 왔다. 시골카페지만 커피맛이 신맛이 나거나 쓰지도 않고 좋았다. 커피를 갖다 주면서 고구마 밭을 보니 커다란 씽크홀이 있었다. 시동생이 씽크홀이 아니라 도랑길 위에 흙더미들이 쌓인 것이라고 했다. 어제 혼자 고랑 위 고구마를 캤으면 큰일 날 뻔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가족들하고 캐서 다행이다. 가족이 있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었고 그것이 가족의 의미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남편은 빠지면 찾지도 못했을 거라 했다. 천만다행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개 넘어 달이 떠올랐다. 크고 환한 달빛은 하늘 위에 뜬 달하고는 달랐다. 마음 가까이에 내려앉은 우리 가족의 한가위 달이었다.


추석 다음날(10월 7일)

추석 다음날 시댁 옆에 있는 산내 구절초를 보러 갔었다. 구절초 축제가 10월 14일부터 시작인데 꽃이 많이 피었다. 하얀 꽃들이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매년 꽃들이 점점 더 퍼진다. 구절초 축제기간이 아니더라도 어느 때라도 와서 머물를 수 있는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어머니와 남편은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한사코 사진 찍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산 한 바퀴를 돌다 내려오다 정읍구절초라고 써진 사진스폿이 있었다. 남편이 선뜻 어머니랑 사진 찍자고 하였다. 둘이서 손으로 하트 하라고 하니 포즈를 취해주었다. 사진 속 어머니와 남편은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저녁은 동생이랑 먹었다. 남편이 명절 때 고기 많이 먹었으니 회를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내키지 않았다. 동네 새로 오픈 한 횟집을 검색하니 가족단위 모임은 적절하지 않고 대기시간이 길어서 가장 무난한 와갈비로 갔다. 혼자 있는 동생이 안쓰럽다. 시간을 같이 보내고 여행도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혼자만의 소망이다. 부안노을 축제 가자고 했더니 겨우 간다는 답변을 받았다. 꼭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0월 8일 수요일

추석연휴 수요일은 점심 이후에 익산 르물랑으로 커피 마시러 가자고 했다. 딸은 익산 간 김에 시장에 들러서 고구마를 사자고 했다. 신유진 작가님 남편이 운영하는 르물랑은 익산 명소다. 커피 맛이 유명하다. 지난번에 왔을 때 재료소진으로 문이 닫힌 아쉬움이 있었다. 카페 입구에 담쟁이넝쿨이 눈에 간다. 작은 화분들이 카페 창가에 나란히 있었다. 카페 안은 자그마하다. 카페 마시는 공간에 5개의 크고 작은 테이블이 있고 책을 보는 공간이 따로 있다. 다행히 자리 한자리가 비어있었다. 남편, 딸, 나는 좋아하는 각자의 커피를 시켰다. 커피와 빵 한 조각을 주문했다. 빵이 쪼그만 하지만 부드럽고 맛이 풍부했다. 남편은 카페 인테리어를 보더니 창고에서 커피 마시러 익산까지 오냐고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시장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리가 있는지 발걸음 멈추고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손님들이 나가기 무섭게 다른 손님들로 테이블은 채워졌다. 작가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프랑스인 남편분과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작가님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책과 커피, 빵 냄새가 뒤섞인 공간에 만족했다. 르물랑을 나와 고구마를 사러 가는 남편과 딸이 따로따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찰칵찰칵 찍었다. 지난번에 가판에서 고구마를 판 할머니는 나오지 않았다. 시장 주위를 돌다 밤고구마상자를 봤다. 2킬로에 만원이었다. 더 사자고 했는데 맛없으면 어떡하냐는 말에 아쉬움을 뒤로했다. 집에서 쪄먹으니 포근하고 맛있었다. 소박한 삶들이 쌓인다. 작고 소중한 시간들이 쌓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간다.


10월 9일 마지막날

남편과 추석연휴 마지막날에 횟집에 갔었다. 음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남편과 회를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낸 것에 감사하다.



긴 추석연휴 어디를 갔다 오지는 못했지만 하루하루 알차게 보냈다. 가족들과 만나고 더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아쉬운 것은 아들이 근무 때문에 항상 같이 하지 못하다는 것이 제일 크다. 아들과 여행을 기대하면서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올해 추석도 매년 오는 명절처럼 멀리 떠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멀리 다녀왔다. 송편대신 고구마를 캐고, 화려한 여행 대신 가족과 사진 한 장을 남기고, 계획된 일정 대신 순간순간을 음미하며 보냈다. 삶도 어쩌면 고구마 캐기와 비슷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속 깊이 박혀 있는 것들이 있고 그것을 꺼내기 위해서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결국 캐낸 것은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비로소 제맛을 낸다. 가족이라는 이름도 그렇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바로 곁에서, 매일의 일상 속에서 조금씩 쌓여간다. 이번 추석에도 깨달았다. 소중한 것은 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