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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Nov 01. 2019

감점(減點) 사회와 가점(加點) 사회

네거티브 경쟁에 빠진 대한민국

우리 사회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마치 폭로의 전쟁터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모두가 서로의 흠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범인을 잡아 죄를 뒤집어 씌워야 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검찰과, 정적을 제거해야 생존할 수 있는 승자독식의 생태계 속에 살고 있는 정치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언젠가부터 언론마저도 네거티브 전쟁에 슬그머니 참전해 ‘열일’ 중이다.


근대의 시민은 투쟁을 통해 등장했지만,
탈근대의 시민은 성찰을 통해 성장한다.
- back2analog -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최근 내가 밀고 있는 명언(?)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는 밖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사춘기 딸을 키우며 이해의 주체는 이해를 받는 대상이 아니라 이해를 해야 하는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존재할 뿐... 딸도 어쩌지 못하는 내가 감히 누구의 흠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분야와 영역을 떠나 성찰이 가장 필요한 시대에 우리의 눈은 자신이 아닌 밖으로 고정되어 다른 사람의 흠집을 찾아내기 위해 몰입하고 있다. 왜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무한 경쟁 사회를 살아오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또는 의도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흠을 감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흠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똥이 묻은 개가 자신에게서 풍기는 냄새의 원인을 다른 개에게 돌리기 위해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신을 대체해 온 인간의 전문성이 그 쓸모를 다했기 때문이다.

신의 종말을 고하며 시작된 근대에는 인간 전문가가 신의 역할을 대체했다. 모든 영역에 전문가가 생겼고. 그 전문가는 점점 더 세분화되어 가고 있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전문가에게 전가된 책임의 크기는 무한대로 커지는데, 그 보상이 파이는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권한과 책임, 보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져버린 전문성

이 시대 전문성은 각기 자신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검사의 전문성은 범인을 잡아 죄를 입증하는 것이고, 정치의 전문성은 자신을 찍어준 유권자의 이익과 무관하게 정치적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교사의 전문성은 교육이 이 사회를 경쟁의 수렁으로 내몰더라도 가르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언론의 전문성은 사실의 보도와 상관없이 포털을 통해 대중들에게 클릭당하는 것이 되어 버린 듯하다. 나의 전문성은? 나는 전문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전문성에 반대하는 반반(反半) 전문가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내가 가장 모욕스럽게 느끼는 것은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전문가라 칭하는 것이다. 전문가가 난무하는 시대, 전문가들은 모두 각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 사회를 찢어발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는 전문성의 분화로 인해 이 시대의 모든 상식이 상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어항 속 물고기이며 어항 속 세상만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나서는 이것만이 세계의 전부고 진리인 줄 안다.
- 고바야시 히데오 -


문제는 전문가처럼 자신만 가지고 있는 상식을 보편적인 상식이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상식을 주장하며 민원을 요구하는 캣맘에게 보낸 카톡 중 ‘일부’이다.


저는 캣맘이 아닙니다. 하지만 고양이와 더불어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성이 아닙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입니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교육의 경쟁시스템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어 늘 아이들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살고 있습니다.

지난번 면담 때 반복적으로 들었던 ‘상식’... 제 생각에 그 상식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캣맘들께서 서로 고양이에 대한 사랑을 나누며 형성된 캣맘들의 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식을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신다면... 예상컨대 행정과 캣맘이 가지고 있는 상식의 간극은 계속 더 벌어질 것입니다. 상식을 말씀하시기 전에 나의 상식이 상대방에게는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한 번쯤 의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행정엔 행정의 상식이 있고, 전 그 행정의 상식이 보편적인 시민의 상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도 캣맘을 이해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당장 기대하기는 답변을 드리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해는 이해받는 대상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해야 하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존재할 뿐...
고양이만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다른 상식 속에서 살아온 행정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시면 안 될까요? 미팅 때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악마가 아닙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다만 역할이 다르다 보니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캣맘들도 태어날 때부터 캣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상식의 일방적인 요구는 상식의 확대를 오히려 방해할 수도 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캣맘들의 앞선 생각이 행정의 힘과 만나 보편적으로 일반화되기를 바랍니다. 진심입니다.

난 얼마 전 쓴 시(詩) 덥지 않은 글에서 “상식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몰상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모두 가 자신의 주관적 상식을 기준으로 다른 상식을 부정한다.


근대를 관통하는 사이 오로지 가치 투쟁에 몰입해 온 인류는 그 가치가 정보의 확장 속에서 붕괴되거나 불확실한 것으로 치부되자 갈 길을 잃은 듯하다. 문명의 진보는 물질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이 ‘균형’을 맞추며 나아가야 한다. 개척 정신으로 무장했던 미국이 물질적 성취는 이루었으나 정신적 성장이 그에 미치지 못하고 마약과 폭력으로 범벅이 되는 것을 지켜본 ‘제레미 리프킨’은 “유러피안 드림”이라는 책을 통해 ‘어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선언한다.

IT 기술의 발달로 물질의 성장과 혁신은 갈수록 가속화되는데,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한의 정보 속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정보만을 취사 선택해 악용을 하니 인류의 정신적 영역은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셈이다. 퇴보하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물질 영역과의 간극이 갈수록 커져 문명의 양 축인 물질과 정신 영역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 영역인 IT의 혁신을 인류가 감당하기 위해서는, 있는 정보로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감점 사회에서 정신의 영역이 성장하는 가점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유러피안 드림”을 이야기한 이유는 그나마 유럽은 물질과 정신 영역의 성장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감점 사회로 퇴보할 것인가 아니면 가점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당장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네거티브를 멈춰야 하는 이유이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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