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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Oct 31. 2019

모든 ‘연역’을 폐하라!!!

귀납과 연역에 대한 고찰

논리를 전개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바로 ‘연역’과 ‘귀납’이다. 어려운 얘기 다 거르고 다소 극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연역은 답(가설?)을 정해놓고 그 답이 맞는지 증거를 찾아 입증하는 방식이다. 마치 ‘윤석렬이 조국은 범죄자다.’라고 답을 정해 놓고 온 가족을 탈탈 터는 것처럼... 반대로 귀납은 답을 정해 놓지 않고 일단 증거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 증거에 기반해 나중에 답을 정한다. 바로 앞 글에서 썼듯이 현대인은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여유’를 찾지 못하고 바쁜 일상으로 내몰린다. 우리가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를 정도로... (소고기 사 먹으려고?)

개콘의 ‘어르신’ 코너... 삶의 모든 목적이 소고기로 귀결된다.

아무래도 보다 효율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논리 전개 방식은 ‘귀납’보다는 ‘연역’이다. 그러다 보니 현대인은 귀납 자체를 망각한 듯 보인다. 모든 가치 판단에 앞서 일단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신념을 중심으로 답을 미리 정해 놓고 그 답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한다. 그 과정에서 답을 수정할 수 있는 현대인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답을 수정하기에는 일단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 답을 수정하고 나면 거꾸로 신념을, 경험을, 지식을 순서대로 부정해야 하는데, 그건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추억은 건드리지 마라!


내가 평소 존경하는 한 선배로부터 들은 말이다. 누군가와 논쟁에서 있었던 답답한 상황을 토로한 후 들은 말이다. 연역의 부정은 추억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추억의 부정은 추억의 당사자가 살아왔던 모든 삶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인지하라는 충고다. 난 그 충고를 매우 고맙게 받아들였고, 그 충고를 해 준 선배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것은 토론의 당사자가 가지고 있는 논리의 중심이 단지 ‘추억’일 때이다. “세대 게임”의 저자 ‘전상진’은 태극기 집회에 나온 어르신들을 ‘추억의 실향민’이라 지칭했다. 남자들이 침을 튀겨가며 군대 얘기를 하는 것은 그 시절이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비록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과거지만, 그 과거를 현실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의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태극기 어르신들에게 ‘다까끼 마사오’의 딸 ‘박근혜’는 그런 존재일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의 이해부족이다.

다시 연역과 귀납으로 돌아오자. 정보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지금, 어쩌면 논거의 증거를 수집해 답을 찾는 ‘귀납’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증거를 먼저 수집하는 그 비효율적인 노력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조커’는 이미 악당으로 규정되어진 조커가 악당이 되는 과정을 귀납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보다 ‘히스 레저’의 조커가 더 강렬했다.

어쩌면 인간은 연역적 논리 전개의 방식이 자신들의 지속가능성에 치명적이 해가 되고 있음을 이성이 아닌 동물적 감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역은 효율적이고, 귀납은 창의적이다!

결론이다.

첫째, 아무리 효율적이라고 하더라도 연역적 논리 전개 방식은 위험할 수 있다. 아니, 위험하다.

둘째, 자신의 생각을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확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항상 의심하라.

셋째, 시간이 걸리더라도 답을 정하지 않고 다양한 증거를 수집하는 귀납적 방식에 적응하라.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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