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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Sep 30. 2020

누구나 이 더러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포스트 노멀을 상상하며...

# 인간과 자연의 분리

우리가  딛고 살아가고 있는 지구의 불행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비롯되었다. 애초에 인간은 자연에 속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에서 이탈했다.  계기는 유발 하라리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 칭했던 농경이 제공하였다. 인간은 농경이라는 생산관계의 대상이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로 성장했지만, “사람의 힘을 더하지  저절로()  그대로() 현상 자연을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던 동물과 식물, 뿐만 아니라 태양, 바람, , 공기마저도...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대상이 되어버린 자연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철저하게 파괴해 왔다.


난 페미니즘과 함께 부상하고 있는 생태주의를 매우 근원적인 성찰이 담긴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오래된 관성에 급브레이크를 걸어 다소 급진적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 인간과 인간의 분리

인간의 불행은 개인이 집단으로부터, 내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서 비롯된다. 계급으로, 성별로, 인종으로, 나이로, 모든 경험의 차이가 만들어 낸 낯섦은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한 덩어리의 인간을 끊임없이 분리시켜 왔다. 집단은 자발적 이성을 가진 개인의 집합체요, 모든 개인은 내가 분리하고자 하는 이 더러운 사회 구조의 피조물일 뿐이다. 근대로 접어들며 이윤 노동을 앞 세운 자본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 왔던 공공의 영역을 단지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대상화시키며 집단의 해체 논리를 제공하였고, 모든 인간과 인간을 이익의 경쟁관계로 분리한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모든 공공 영역을 더 적극적으로 해체했다. 나아가 최근 들어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IT를 통해 정보 권력을 손에 넣은 개인들은 자신들이 섭취한 편협한 정보를 바탕으로 생산한 가짜뉴스로 집단뿐만 아니라 나 이외의 모든 개인을 배척하며 끊임없는 고립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가짜뉴스는 장님이 만진 코끼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가짜뉴스의 생산자들은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져 경험한 코끼리를 다른 장님들이 코끼리가 아니라고 하니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 한계 없이 확장되고 있는 세상의 크기와, 나노 입자처럼 복잡해지고 있는 세계 앞에 모든 인류는 코끼리 앞에 놓인 장님 신세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과학기술혁명을 통해 기적을 만들어 온 오만한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를 장님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서로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고 축적될 때마다 사회의 이론도 그 정교함을 더해 갔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정교해짐에 따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때로는 전문적으로, 때로는 실용적으로 분화되어 접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그 접점


리처드 테일러는 아무렇게나 흩뿌린 잭슨 폴록의 그림에서 프렉탈의 규칙을 찾아냈고, 자본주의를 통찰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 인식은 상대성 이론을 주창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찰한 두 거장은 정확히 4년 동안 이 지구 상에 함께 존재했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5일 세상을 떠났고, 아인슈타인은 4년 전인 1879년 3월 15일에 태어났다. 아인슈타인은 1945년 5월 미국의 사회주의 저널인 『Monthly Review』창간호에 실은 “Why Socialism”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무정부주의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며, 이 악을 제거하는 길은 사회주의 경제를 세워 사회 전체를 위한 교육체제를 수립하는 길 뿐”이라고 주장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서로를 이끌어주는 견인차 역할을 해 왔지만,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전문화와 실용화 과정에서 분화된 다양한 사회 체계들은 자기 체계의 확대 재생산에만 몰입하며 이 사회를 논리적으로 분해해 나가고 있다.


# 입장에 갇힌 신념과 이익이 된 가치


사회는 정원과 같다. 국가통제주의자(좌파?)들은 유기적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상호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유시장주의자(우파?)들은 정원이 돌봐야 할 존재임을 알지 못한다
(조너선 하이트, “민주주의의 정원” 추천사 중).


시대마다 시대를 아우르는 대척점이 존재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또 유지되고 있는 대척점은 다름 아닌 계급이다. 마르크스가 계급을 단지 숙명이 아닌 인식의 문제로 규정하고 난 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계급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계급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가 새로운 신념의 대척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정점이 바로 구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가 대립했던 동서냉전이다.


『평균의 종말』의 저자 토드 로즈의 말처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더 어려워하는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쿠울하게 참조하지 못한다. 생각해 보니 나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누군가의 주장을 주장 그 자체보다 나에게 축적된 인식의 경험에 의존해 지레짐작한다.


농경시대처럼 세상의 크기가 정해져 있었을 때는 경험이 큰 힘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세상의 크기가 확장되고 있는 지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경험이 또 다른 권력이 되어 세상의 진보를 막아서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개인이 취하고 있는 입장의 다양성이 인간의 인지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안드로메다까지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다양해진 입장은 우리가 살아왔던 관성 그대로 그 수만큼의 대척점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우리 모두는 입장을 신념으로 착각하고, 이익을 가치로 오해한다.


# 진영논리로 대체된 진보와 보수

난 박근혜가 세월호 때문에, 최순실의 국정 농단 때문에 파면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월호와 국정농단은 박근혜 파면의 동기이자 결과가 되었지만, 박근혜가 파면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박근혜가 가지고 있는 시대 인식이 대다수 시민들이 평균적인 상식과 크게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를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던 MB와, 선진국의 문 앞에 바짝 다가서 있는 대한민국을 원시 샤머니즘 국가로 되돌려 놓은 박근혜...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누구만큼이나 적지 않은 시민들은 MB, 박근혜 정권 하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논두렁 시계로 인해 마음이 흔들렸던 일부(?) 시민들의 노무현 트라우마는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강력하고도 비이성적인 진영논리를 구축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과 무관하게 비이성을 논리로 합리화시키는 문빠의 책사 역할을 유시민이 자처하고 있다면, 뉴스공장의 김어준은 내가 맞은 만큼 되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초딩 나팔수라고 할 수 있다.


정에 반하면 합으로 나아간다는 선형적 역사관은 근대의 산물이다. 지금은 정에 반하면 합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정도 반도 더욱 단단한 진영의 틀에 갇히는 비선형적 역사관이 관장하는 시대다. 과로에 시달리는 백수로 살고 있어 디테일을 살필 여력은 없지만, 그 비이성적 진영 논리에 손호철 교수는 대한민국을 반지성 사회라고 일갈했고, 모두 까기의 대명사 진중권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반대편에서 서서 이례적으로 한쪽만을 성실하게 까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은 이미 사라졌다. 친문과 반문이 서로를 조롱하며 대치하고 있을 뿐이다.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픽시스 사령관의 통찰처럼 그렇게 된 원인의 책임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있다.

친문이 이성을 잃은 진영 논리를 펴고 있다고, 반문으로 대동단결하고 있는 구진보와 구보수는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신의 진지에서 빠져나와 문재인 정부에게 기계적인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코로나 음모론과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에 빗댄 문재인 대통령의 업무 공백 시간이다. 대통령의 통제할 수 있는 국내 상수와 대통령의 통제 밖에 있는 국외 변수를 시간이라는 공통점을 기계적으로 적용해 비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 그래서 어쩌라구?

집단의 이익이 상대적으로 중요했던 시대는 집단이 얻을 수 있는 9개의 이익을 위해 1개의 불편을 기꺼이 감수했던 긍정 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집단으로부터 분화된 개인의 약진으로 인해 집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부정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내가 1개의 불편을 감수하면 9개의 이익은 집단이 아닌 다른 개인에게 돌아간다는 불신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이견의 충돌 방식은 ① 이견 간의 벌어진 간극, ② 이견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차이, 그리고 ③ 집단과 개인에 대한 시대의 인식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생존을 위해 연대했던 원시 시대를 제외하고, 이익을 위해 경쟁하기 시작한 그 언젠가부터 이견을 대하는 태도는 위에 제시한 3가지 조건에 따라 때로는 해학으로, 폭력으로, 혐오로, 자해로, 또는 조롱 등으로 변해 왔다. 이견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나도 알지 못한다. 만약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이견이 만나 절충이 되는 모 지점에 있을 것이다.


사회는 분리를 통해 더 정교해지고, 단단해진다. 물질을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나노로 분리해 인지하는 것은 사회를 단지 양적으로만 변화시킬 뿐이다. 또한 분리는 새로운 연결의 계기를 마련하며 질적 변화의 토대를 축적한다. 사회의 질적 변화는 분리되어 있던 것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새로운 기준을 요구하는 “뉴 노멀”, 또는 기준의 의미 자체가 소멸하는 “포스트 노멀” 시대를 앞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폭력으로, 혐오로, 조롱으로 이견을 분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분리해 낸 다양한 파편들을 연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경제 체제와 신념으로 분리되어 있는 남과 북이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는 것이 단지 양적 변화라면, 두 체제가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질적 변화로 나아갈 수 있다. 오만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한계를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영에 굳게 다리를 묻고,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혐오하거나 조롱할 뿐이다.


아마도 내 주장은 누군가의 이익, 또는 불이익으로 인식되어 다양하게 찢어발겨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찢어발겨질 사회에 나 또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 인지할 수 있으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 빌어먹을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표지 이미지 :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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