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이 현실에 뿌리내리기 위해선 그 신념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현실에 구현된 신념이 확산되기 위해선 적절한 ‘인맥’도 필요하다. 이 세 가지가 고루 “균형”을 이룬다면 우리 사회는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균형을 이루는 대상이 모두 같은 비율로 존재해야 한다는 기계적 균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균형은 곧 아름다운 비율을 찾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과학은 적절한 비율을 찾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는 밀로의 비너스를 통해 8등신이라는 비율을 구현했고, 지금도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모니터나 A4용지의 가로, 세로는 수학적으로 가장 아름답다는 황금비율을 따른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음악도 피타고라스가 소리의 주파수가 가진 울림의 비율을 계산해 음계를 만들어 낸 결과이다.
문화 콘텐츠도 기획과 제작, 그리고 매체의 3박자가 고루 균형을 이루어야 성공할 수 있다. 기획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영역이라면, 제작은 상상을 눈에 보이는 현실의 영역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콘텐츠가 적절한 매체를 타는 것은 용의 눈에 점을 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 구체적으로 한 편의 드라마가 시청자의 선택을 받기까지는 작가가 상상을 글로 풀어내야 하며, PD가 다양한 제작진과 함께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TV 채널이라는 매체를 타지 않고는 시청자에게 전달될 수 없다. (차암 쉽죠, 잉~)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역할의 관계가 협력이 아닌 권력관계로 작동하는 모습을 흔하게 접한다. 대표적인 것이 처음에 꺼냈던 신념과 실력, 그리고 인맥의 역할 관계다. 우리는 근대에 신념이 곧 실력이던 시대를 관통해 왔다. 신념이 어떻게 구현되고 확산되는지보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신념의 상호 보완이 아닌 대체의 시대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필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 인류는 그 어떤 신념도 다른 신념을 대체할 수 없는 불확실성 앞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은 씨를 뿌리면 그것이 열매를 맺는 필연의 시대가 아니다. 노력이라는 필연이 성공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선 더 많은 우연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오죽하면 운7복3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꼰대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는 '태도의 차이'가 그 기준이 된다. 꼰대는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를 떠나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생각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부도덕한 보수와 싸우는 과정에서 꼰대스러운 진보가 등장했고, 가부장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여성도 꼰대가 될 수 있으며, 나이를 권력처럼 휘둘러온 어른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온 아이들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이른바 어린 꼰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생각을 대하는 ‘태도'이다.
신념도 그러하다. 바야흐로 신념이 실력이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신념만으로 인정받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 신념을 어떠한 태도에 탑재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문화콘텐츠로 비유하자면 신념은 기획이고, 실력은 제작이다. 그리고 문화콘텐츠가 확산되는 채널인 매체는 인간관계, 즉 인맥이다. 인맥을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인맥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신념과 실력과 무관하게 작동될 경우에 한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신념과 실력, 그리고 인맥이 아름다운 비율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쳐서는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신념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꼰대고, 신념 없이 실력만 주장하는 사람은 영혼이 없는 기계와 같다. 그리고, 인맥에 기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소위 전문용어로 ‘양아치’라 부른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군가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진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기계적 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적어도 양아치로 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경계하게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