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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Mar 18. 2020

코로나 사태가 제공한 새로운 기회들...

코로나에서 살아남기 #3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한국에서 코로나의 기세가 잡히는 듯싶더니 이제는 세계가 뒷북을 치고 있다. 연일 공포감이 확산되는 가운데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표현에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보이지 않는 이면이 있고, 사회적 현상 또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의 부정성 이면에 존재하는 긍정성을 살피고자 하는 ‘양시론자(兩是論者)’의 입장에서 코로나가 과연 부정적인 면만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필연에 단련된 우리가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의도와 무관한 긍정성을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잠시 멈춤

인류는 언젠가부터 스스로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뒤에는 맹수가 쫓아오고 있고, 앞에는 강이 막고 있으니 멈추면 죽고, 죽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지금은 쫓아오는 맹수도 없고(사실은 모두 죽여 없앴고...), 강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배도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쉬임 없이 달려온 인류의 관성은 이제 생존이 아니라 이익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 생존의 시대, 잘 달리지 못했던 인류는 맹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리고 이익의 시대, 잇속에 밝지 못하거나 태생적으로 이익을 취할 수 없는 구조에 갇혀 있는 인류는 양극화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맹수의 먹잇감과 양극화의 희생자 중 누가 더 나은 위치에 있는지는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현재, 인류는 코로나로 인해 강제 멈춤 상태에 놓였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처럼 국가 부도가 나더라도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도덕성을 거론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그렇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도 마찬가지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을지, 아니면 안타깝게 여기고 있을지는 모르나, 누군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득을 보고 있다. 마스크 생산 업체는 당연하고, '배달의 민족', '딜리버리히어로' 등 배달업체 주가가 코로나로 인해 치솟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사실 그 이득은 노력이라는 필연이 만든 결과가 아니다. 경제적인 파급 효과라는 것에 대해 무지하므로 황당한 주장일 수도 있겠지만... 우연이 만든 이득에 대해 국가가 세금으로 취해, 우연의 피해 당사자에게 분배하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 본다.


예를 들면... 주택이 주거가 아닌 투자의 대상이 되면서 우리는 본인의 노력과 무관한, 어찌 보면 우연이 만든 호재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개척시대 황금광산처럼 재화의 총량이 무한대여서 먼저 취하는 사람이 임자인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세계적인 저성장 시대이다. 미국 월가에선 미 연방준비제도가 코로나로 인해 기준금리를 1.0%로 낮출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사실상 자본의 파이가 더 이상 커지지 않는 제로 금리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이익의 파이가 정해진 상황에서 노력이 아닌 우연에 의해 이익을 누리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발전, 아니 지속가능에 이익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이익에 눈이 먼 개인은 자신의 손해에 대해서는 그 필연을 따져 대상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도, 우연이 만든 이익에 대해서는 자신의 탁월한 선택으로 필연화시키는데 익숙하다. 누군가 큰 이익을 취하면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어쩔 수 없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다. 초기에 인권을 무시하고 식민지를 강제 지배해야 유지할 수 있었던 투박한 자본주의는 금융시스템을 통해 이익을 효과적으로 집중시키고, 피해는 세련되게 분산시키며 그 태생적 모순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


말이 또 삼천포로 샜다. 아무튼 코로나로 인한 '강제 멈춤' 상황에서 인류의 목표가 생존이라면 이익을 적당히 분배하면 된다. 아무 문제없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더 잘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확히는 자본주의로 인해 생존이 아닌 이익을 목표로 달려온 인류가 그 관성을 쉽게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과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 독일과 프랑스의 부유층은 국가에게 부유세를 걷어 이 위기를 극복하라고 요구했다. 성난 민중이 전제주의 시대의 왕을 단두대에서 처형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적어도 유럽에 살고 있는 부자들은 민중들이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지면 장차 자신의 이익을 침해할 것이라는 것을 동물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은 '사회적 거리 두기'에 대해 살펴보겠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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