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서 살아남기 #1
1. 이해와 이유...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사건을 대할 때 상반된 두 가지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몰이해의 태도다. 이 태도는 매우 절묘하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이해와 책임의 주체를 분리시킨다. 이해의 주체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인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이해해야 하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흔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이해의 책임을 사건 그 자체에 전가시키는데 매우 익숙하다.
사건을 대하는 다른 태도는 사건의 이유를 탐구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안 나고, 밥을 먹어야 변도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과정보다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문제의 원인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관심 영역이 아니다. 그렇게 사회문제는 점점 더 해결과 멀어지고 있다. 뭐 상관은 없다. 사회문제는 사회문제일 뿐, 사회문제가 당장의 불편함과 거시적인 생존을 위협할 수는 있어도 과거 자연이 만들어 낸 재앙처럼 인간의 생존 그 자체를 정조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없지 않다. 난 산업사회와 지금의 문명을 이끈 전문성의 분화가 그 대표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성이 분화된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 따위는 관심이 없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대중들은 전문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바쁘고, 전문가들은 각종 제도와 시스템을 동원해 책임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몰입한다. 사회가 불평등한 이유는 분배에 실패한 정치인의 탓이고, 불공정한 사회를 만든 건 관료의 모럴 해저드가 그 원인이고, 교육이 우리를 고통으로 내몰고 있는 이유는 교육 전문가의 무능력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당을 수준을 훌쩍 넘어서고 있는 코로나 사태를 대하는 전문성의 다양한 태도를 통해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탕으로 내몰고 있는 코로나의 문제로부터 한번 벗어나기를 '시도'해 보겠다.
2. 정치의 태도
모든 전문성들이 코로나를 중심으로 주판알을 튕기기에 바쁘다. 그중 갑 of 갑은 단연 정치 영역이다. 정치는 그 어마무시한 영향력에 걸맞게 부작용도 크다. 세상에 꽁짜는 없다. 정치에 권한을 대의한 딱 그 정도만큼 이 시대에 필요한 시민의 자발적 성장은 더뎌질 것이다. 정치권이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코로나의 통제는 아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총선을 앞두고 코로나 사태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구도를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수권정당은 하루빨리 코로나 정국에서 탈출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유리하다. 과도한 공포를 걷어내야 하고, 거품처럼 커지고 있는 공포심을 추경을 통해 잠재워야 한다. 반면 공성전을 펼쳐야 하는 야당의 입장에선 코로나 정국이 총선까지 이어져야 유리하다. 그리고 대중들이 코로나에 대해 실체보다 더한 공포를 느껴야 한다. 그래야 그 책임을 현재 대한민국을 운영하고 있는 수권정당에게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언론의 태도
조국 사태와 더불어 코로나 사태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는 연구의 대상이다. 언론의 목표는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포털에서 대중들에게 클릭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야 생존, 아니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해 봤냐는 김사부의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익을 생존의 문제로 착각한다. 죽을 수는 있어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는 없다. 과거 군부독재라는 절대악과 목숨을 건 투쟁을 하면서 굳어진 신념의 관성이 이익으로 옮아갔다. 신념에서 이익으로 목표가 바뀐 언론이 짠 공포의 굿판 위에서 대중들은 다양한 사재기로 응답하며 신나게 널을 뛰고 있다. 언론은 누구보다 가장 빠르게 추가된 확진자 수를 공표하기 위해 경쟁한다. 대중들은 확진자의 수를 확인하며 연일 공포감을 더해간다. 확진자가 늘어난 것인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확진자를 찾아낸 것인지는 언론도 대중도 관심이 없다. 전자라면 공포겠지만, 후자라면 적절한 대처일 수 있는 이 어마어마한 관점의 차이를 언론은 비비고, 대중들은 섭취한다.
4. 대중의 태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지도자를 소환해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앉혀 놓으면 우리가 당면한 이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장담컨대 솔로몬의 지혜도, 예수나 마르크스의 통찰도, 세종대왕의 애민도 이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의 책임을 우리는 너무나 간편하게 인간 전문가에게 전가하면서 스스로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책임의 전가가 답이 아닐 때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연대와 협력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인간은 과거와 다르게 너무나 스마트해졌다. 부족함을 느껴야 주변에 도움을 청할 텐데, 모두가 모두 자신이 스마트하다는 확신에 빠져 그 누구의 손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가 탄핵한 박근혜가 대통령이었다면 이 문제를 술술술 풀어냈을까? 아마 책임 자체를 전가하지 않고, 국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더 슬기롭게 이 사태를 벗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무책임한 책임의 전가가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5. 소결
인간이라는 집단은 아주 먼 과거나 현재나 모두 그 전체를 살필 수 없는 숲 속에 살고 있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나무와 야생동물이 득실거리는 숲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관계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근대 인류가 살고 있는 숲은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든 숲이다. 그 숲 속에서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존재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나와 적극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통제 불가능한 자발적 인간이다. 원시인류는 무지라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공포스러워했지만, 현대 인류의 공포는 무지의 영역이 아니라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정치와 언론, 그리고 인간이 만든 모든 전문성이 그 통제 불가능한 영역을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찢어발기고 있다는 것이 인간의 공포심을 더욱 키우고 있다. 장님의 눈으로 코끼리를 만지면서 자신이 장님이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인간의 오만과 확신으로 인해... 우리는 점점 더 공포스러운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오만에 빠진 통제 불가능한 자발적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이 과연 방법일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