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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Mar 25. 2020

어쩔 수 없다?

“이태원 클라쓰”가 끝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길거리에 떨어진 50원을 경찰서에 갖다 준 적이 있다. 그 50원을 경찰이 주인에게 돌려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당시 50원이란 돈은 초등학교 2학년에게 맛난 과자를 사 먹을 수 있는 유혹에 빠지기도, 또 적당히 양심을 지키기에도 충분한 돈이었다. 지금 물가로 치면 한 천 원쯤 되려나? 북에서 보낸 삐라를 경찰서에 갖다 주면 학용품을 주고, 간첩 신고 포상금이 3천만 원(맞나?)이었던 시절, 대부분의 초등학생은 신고정신이 투철했다. 당시 ‘고교 얄개’로 유명했던 이승현과 존 레논이 사랑했다는 임혜진(그래서 imagine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 주연했던 한 청춘영화에서는 팝송 “Sad Movie”를 다음과 같이 개사해 크게 유행시키기도 했다.

아아아 간첩 신고는 국번 없이 113
뚜뚜뚜 통화 중일 때는 잽싸게 112
(oh~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


지금은 길에 떨어진 현금과 양심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시대인 것 같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모처에서 주인을 잃은 고액의 돈봉투를 주웠다면? 아마 보편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돈봉투를 경찰서에 갖다 줄 것이다. 그런데 양심과 무관하게 가족의 병원비가 급하거나, 아파트 대출금 때문에 쪼들리는 상황이라면? 또는 핸드폰이 구형이라 친구들에게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거나, 꼭 사고 싶었던 최신 유행 아이템이 있는 청소년이라면? 지금은 소소한 양심을 지키기엔 크고 작은, 그리고 이미 시대와 결합해 단단한 구조가 되어 버린 사정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런 시대에 박새로이처럼 원칙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싫은 건 싫다, 좋은 건 좋다.
자기 가치관대로 소신대로 사는 거
어려운 일 갔지?
온갖 핑계대면서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거겠지...
(15화, 조이서)


드라마를 드라마로만 봐야 하는데, 드라마라는 문화 콘텐츠는 또 시대를 배경으로 태어난 거라 반드시 현실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을 일만은 아니다.


최근 대중들이 좋아하는 문화 콘텐츠의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대리만족’이다.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하고 쉬운 원칙을 지키고 사는 게 갈수록 어렵다. 그래서 그 당연한 원칙을 지키며 사는 가상의 캐릭터를 통해 우리는 대리만족을 한다. 대리만족이라도 하는 자신에게 만족을 하면서...

이 시대의 영웅은 멀리 있지 않다

김사부와 박새로이처럼 원칙을 지키며 사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고, 또 쉬울 수도 있다. 문제는 시도 조차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걸음마를 포기한다면 인류는 직립 보행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칙을 지킬 수 없다고 자신이 지켜야 할 원칙을 아예 세우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원칙을 하나 세웠다.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이
이 사회의 구조적 성장에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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