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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Apr 29. 2020

2012년 4월 29일의 일기

페이스북은 과거의 오늘 내가 썼던 글을 강제로 소환해 보여 준다. 8년 전에 만났던 청년...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집 근처 공원에 있는 농구장을 들렀다. 마침 농구장에서 혼자 공을 던지고 있는 33살의 필리핀 노동자가 있길래 원게임을 했다. 필리핀에서는 한국의 축구만큼이나 농구가 인기 있다고 들었다. 제법 잘 하기는 했지만 내가 10대 6으로 이겼다. ㅎㅎ 
농구를 하고 있는데 19살의 백수라고 자신을 밝힌 한 청년이 농구를 가르쳐 달래서 간단한 드리블과 슛, 레이업을 가르쳐 주었다.
농구를 잘하고 싶어 하는 19살의 백수라...
난 일찍 대학을 포기한 젊은이라는 생각에 측은지심이 들었다. 두 차례의 지도대국(?)을 마치고 숨을 돌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대학은 안 가요?"
"유학 준비하고 있어요.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한국엔 마음에 드는 대학이 없어서요."
(어쭈? 좀 시건방진걸?)
"유학을 준비한다면... 집에 돈이 많거나... 아님, 학문에 대한 남다른 꿈이 있어서일 것 같은데... 어느 쪽?"
"집에 돈이 많긴요. 돈이 없어서 2년 전에 검정고시 패스했는걸요?"
(앗! 내가 뭔가 오해를...)
외국에서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길래 혹시 장하준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책 제목을 줄줄줄 대며 장하준을 좋아해 최근에 나온 책까지 다 읽었다고 한다. 한 시간 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중간중간 생소한 경제학 용어까지 사용하는 폼새가 말뿐이 아니라 정말 큰 꿈을 품고 유학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농구를 가르쳐 달라는 이유도 농구장에 자주 오는 필리핀 노동자랑 농구도 하며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였다고...

••••••.
오늘 참 속이 꽉 찬 제대로 된 젊은이를 만났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길래 농구공을 챙기며 인사를 했더니 나랑 얘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며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 자알 하면 미래의 위대한 경제학자와 친분을 쌓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명함을 한 장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젊은이들... 만나서 얘기도 해 보기 전에 혀부터 끌끌 차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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