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계 위에 세워진 철옹성 또는 모래성, 문명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는 현재를 변화시키려는 자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 그리고 그것에 무관심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범벅이 되어 살고 있다. 누군가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세상이 너무 변하지 않는다고 푸념을 한다. 세상의 변화를 대하는 그러한 태도는 변화의 방향성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세상의 변화 여부, 속도 등에 대한 상대적 인식의 결과는 아니다. 즉, 현재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자는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면서도 늘 세상의 빠른 변화 속도를 못 따라가 헐떡이고 있으며, 반대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 또한, 세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동시에 변하지 않는 세상의 모습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지구는 존재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매일 한 바퀴씩 자전을 하고 있으며, 1년에 한 바퀴씩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고 있다. 위치와 각도가 변하는 것도 변화라면 지구는 지금까지 쉬임 없이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은하계에 속한 작은 태양계, 그중에 티끌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구는 수십 억 년의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생물의 흥망성쇠를 무심히 바라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기도 하다.
관점에 따라 세상은, 그리고 지구는 변하지 않는 철옹성으로 보일 수도 있고, 금방 허물고 새로운 형태를 만들 수 있는 모래성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발전시켜 온 문명은 어떠한가? 문명은 지금까지의 관성에 따라 앞으로도 단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차곡차곡 그 높이를 더해갈 철옹성인가? 아니면 마음만 먹으면 그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모래성인가? 누군가는 매일매일 문명이라는 철옹성에 계란을 던지며 문명의 모습을 바꾸거나 적어도 문명이 향하고 있는 관성의 각도를 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문명이라는 모래성이 혹시라도 무너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문명의 정의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뜻한다. 흔히 문화를 정신적ㆍ지적인 발전으로, 문명을 물질적ㆍ기술적인 발전으로 구별하기도 하나 그리 엄밀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표준국어 대사전)
표준국어대사전의 사전적 정의처럼 문명은 문화와 엄밀히 구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문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웅대함에 비해 문화는 다소 현재 진행형에 갇힌 측면이 강하다. 다시 말해 문명이라는 단어 속에는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발전은 물론이고 문화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문화와 비교할 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깊이와 폭을 가지고 있다. 네이버 영영사전에서 찾아본 문명, 즉 civilization의 사전적 정의에는 그러한 의미가 충분히 담겨 있는 듯하다.
A civilization is a human society with its own social organization and culture.(네이버 영영사전)
정리하자면 문명은 약 20만 년 전 사피엔스로부터 시작한 인류가 인지 혁명(약 7만 년 전), 농업혁명(약 1만 년 전), 산업혁명(18세기 중반), 그리고 최근 5백여 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온 과학혁명의 놀라운 결과뿐만 아니라 그 시작과 과정 모두를 아우르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태동
힘도 없고, 보잘것없는 유인원에서 출발한 사피엔스가 순식간에 자연 생태계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어마어마한 문명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계기는 과연 무엇일까? 상식적으로 직립보행이 작은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직립보행을 통해 사피엔스는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손으로 도구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뇌의 발달이 촉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립보행이 인류 문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 인류의 문명이 직립보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원숭이나,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 중 적어도 어느 한 종은 인류를 위협하는 천적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직립보행을 아예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피엔스는 그 특유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아주 오래전 네안데르탈인 등을 비롯해 다른 동물들을 여러 차례 멸종시켰던 전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직립보행으로 인해 인류의 적으로 성장한 또 다른 유인원이 있었다고 해도 아마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매우 특별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무리를 지어 두 번째로 아프리카를 벗어난 것이다. 이번에 이들은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인간 종들을 중동에서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몰아냈다. 기후 변화의 누명을 약화시키고 우리 조상들을 호주의 대형동물 멸종과 연루시키는 세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45,000년 전쯤 호주의 기후가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눈에 띌 만큼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다. 둘째, 기후 변화가 대량 멸종을 초래할 경우 해양 생명체는 육지 생명체 못지않게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45,000년 전 해양 동물의 개체수가 유의미하게 줄었다는 증거는 없다. 셋째, 호주에서 일어난 것과 유사한 대량 멸종이 그다음 수천 년간 인류가 외부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 정착할 때마다 거듭거듭 벌어졌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에서)
직립보행과 함께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있었던 인지 혁명은 인류가 문명이라는 문을 열 수 있었던 보다 정교한 열쇠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인지 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에서)
인지 혁명을 통해 출현한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은 언어를 말한다. 분절할 수 없는 동물의 울부짖음이 아니라 정확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분절된 언어와 그 언어를 저장하여 후대에 전달할 수 있게 해 준 문자의 발명은 분명히 문명의 성립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문명의 토대
인류에게 문명의 계기를 제공한 언어와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하는 문자는 사고(思考)의 도구이다. 인류는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확하게 언어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생각의 덩어리를 문자를 통해 보다 논리적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사고의 깊이는 더욱 깊어졌으며 그 넓이는 폭발적으로 확장되어 갔을 것이다. 언어와 문자라는 도구를 통해 한 인간이 가지는 사고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블랙홀이 되었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우주가 되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무더운 여름밤, 잠을 쫓아 뒤척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혹시라도 그 상상에 끝을 잡았던 기억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꿈속에서 낯선 상황 속의 “나”를 만나 본 적이 있는가? 현실의 ‘나’와는 아무런 맥락도 닿아 있지 않은 그 “나”는 꿈의 세계에서 현실의 ‘나’와는 무관한 자기 완결적인 “나”의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나”가 ‘나’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꿈속에서 만난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적어도 꿈속에서 만은 말이 되는 “나”의 성장과정을 동반한다. 오죽하면 장자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고 했겠는가? 우리는 매일 밤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블랙홀의 나락과 우주의 끝을 경험한다. 언어와 문자를 통해 확장된 인류의 사고 능력은 이렇게 상상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현실의 나는 작은따옴표의 ‘나’로, 꿈속의 나는 큰 따옴표의 “나”로 표시하여 구분)
하지만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만져 보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 신화,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에서)
수렵과 채집이 생존의 수단이었던 인류는 기원전 1만여 년 전 밀의 재배를 시작으로 농업이라는 생산 방식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 곳에 정착하며 안정적으로 개체수를 늘려나갔고, 생산성의 확대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소유에 따라 계급이 발생하였다. 계급사회로 이전된 농경사회 속에서 잉여생산물을 차지한 소수가 다수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신화라는 허구적 상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A가 B를 가까이 불러 B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나, 사실은 신이다.”
이후 B는 열심히 일했다. A가 일을 시키면 즐거운 마음까지 들었다.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번졌다. 신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A가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것이나, 그에 따른 모든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이나, 자신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서, B는 아무런 불만도 없게 되었다.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중에서)
피지배 계급 B는 그렇게 만들어진 신화를 거역할 수 없는 ‘철옹성’이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배계급 A가 만든 신화는 자신의 지배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그저 ‘모래성’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명은 결국 상상계 위에 세워진 철옹성일 수도 있고, 동시에 모래성일 수도 있다.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현재를 변화시키려는 자에게 문명은 참으로 고집스러운 철옹성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현재를 유지하려는 자는 때때로 문명이라는 모래성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철옹성과 모래성은 문명화의 과정을 겪으며 변증법적으로 절합되어 때로는 철옹성 같은 모래성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모래성 같은 철옹성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충분하지는 않지만 문명과 상상계와의 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살펴보았다. 본론에서는 상상계 위에 세워진 문명이 언제 어떻게 철옹성의 성격을 띠게 되었는지, 또 언제 어떻게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새로운 문명으로 전이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back2analog)